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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때문에 무산된 제헌절 만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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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저께 제헌절에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5부 요인 중 두 명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저녁 식사 하기를 거부했다. 헌법 수호를 선서하고 취임한 노 대통령은 개헌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고, 내년부터는 제헌절이 공휴일에서도 빠진다. 헌법 제정을 경축하는 날 헌법이 외면당하는 참담한 현실을 보여 준 것이다.

 임채정 국회의장이 초청한 대통령과 5부 요인의 만찬 행사는 이날 갑자기 취소됐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이 하루 전에, 또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그날 아침 불참을 통고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참석 행사가 다른 초청 대상자의 거부로 취소된 일은 전무후무할 것 같다. 제헌절 기념 만찬까지 거절할 필요가 있느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 대통령이 자초한 일이다. 노 대통령은 ‘그놈의 헌법’이라며 수시로 헌법을 훼손했다. 그는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금지한 공직선거법에 대해 개인 자격으로 헌법소원 심판도 제기해 놓았다. 그런 마당에 사건 의뢰인과 심판관이 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 나올 이야기는 뻔했다. 중앙선관위의 거듭된 경고에도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면 선거법 위반이겠지요’라며 조롱하듯 선거 개입 발언을 계속해 왔다. 이날 ‘청와대 브리핑’에는 현행 헌법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개헌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이런 상황에 만나 봐야 무슨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헌법 재판은 정치적 융통성을 발휘할 사안이 아니다. 헌법을 기념하는 날 현행 헌법을 성토하는 대통령 말을 들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국회 원로들이 제헌절을 내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한 이 정부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한 것도 노 대통령의 언행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본 것이다. 식사를 거부당하는 참담한 현실은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대통령직이 이 정도로 추락한 것은 나라로서도 비극이다. 대통령직의 권위 상실은 대한민국의 권위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