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Family어린이책] 여든 넷 증조할머니는 내 편지친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할머니, 편지왔어요 조 외슬랑 글, 클레르 플라네크 그림, 정미애 옮김, 교학사, 초등 3학년 이상, 120쪽, 8000원

 “제가 한 말은 초특급 비밀이에요. 안 그러면 다시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지 않을 거예요.”
 수학은 빵점. 역사는 30점. 열두 살 아나벨의 새해는 이렇게 형편없는 시험 점수와 함께 시작됐다. 빵점 맞은 것만으로도 시무룩한데 단짝 루시아와는 절교 직전이다. 이게 다 그 수학 시험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루시아에게 살짝 보여 달라고 한 건데, 똑같은 답안지를 내서 둘 다 빵점을 맞고 말았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다정하게 물어봤지만, ‘베끼지 않았다’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때부터 루시아는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자리를 옮겨버렸다.

 아나벨은 ‘다시는 친한 친구를 사귀지 않겠다’며 훌쩍거린다. 만년필로 편지를 썼다면 얼룩이 졌을 거라면서 딱 한 사람에게만 이 ‘초특급 비밀’을 털어놓는다. 편지는 자동차로 4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증조할머니에게 날아간다.

 아나벨과 증조할머니는 편지 친구다.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엄마, 일밖에 모르는 아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오빠와 남동생은 모르는 두 사람만의 비밀 얘기가 차곡차곡 쌓여 간다.

여든 넷. 이사벨보다 일곱 배나 오랜 세월을 산 할머니는 구식이다. 화창한 날씨에 영화 ‘타이타닉’을 보러 갔다고 썼더니 “좋은 날씨에 왜 컴컴한 영화관에서 끔찍한 여객선 침몰 사고 영화를 보느냐”며 김을 뺀다. 화가 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멍청한 영화”라고 써 보냈더니 “멋진 영화인 데다 주인공 클라크 게이블이 근사한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고 우긴다.

 그래도 아나벨은 할머니 편지를 기다린다. 할머니는 어떤 얘기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들판이니까. 아무도 모르는 속마음을 들판에 외치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메아리가 돌아온다. 단짝 루시아와 멀어진 얘길 적어 보내자 할머니는 “내게도 친구를 잃은 슬픈 기억이 있다”며 “70년도 더 된 옛 친구 생각에 아직도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줄 수 있는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했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라”는 할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루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친구가 됐다.

 깜빡깜빡 정신을 놓고 지난번 편지에 쓴 얘길 또 쓰기도 하지만, 손녀가 보낸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
아나벨은 알까. 갓 사춘기에 접어든 아나벨 만큼이나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할머니에게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참 많다는 걸.

박연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