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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로 가야 하나] 4. 동북아 새 지도를 그리자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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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어령=통일된 한반도는 중국(대륙)편일까, 일본(해양)편일까. 이따금 사석에서 허물없는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에게서 듣게 되는 질문이다. 단순한 궁금증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한반도를 대륙이나 해양의 한 종속물로 보아오던 낡은 잠재의식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한반도의 통일을 내심으로 꺼리고 있는 헛기침 소리로도 들린다. 이러한 물음이 공론화됐을 때 한국인은 과연 무엇이라고 답변해야 하는가. 그 선택지에 따라 마치 베이징(北京)의 작은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미 대륙의 허리케인이 된다는 복잡계 이론처럼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 전체, 그리고 세계의 전 역사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류젠후이=중국의 민족주의는 패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위한 방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를 보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세계화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은 1980년대 개방 정책에서는 주로 홍콩.대만을 통해 서방문화를 들여왔지만 그 이후에는 한.일 양국과 접속하게 된다. 아시아화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온 것 가운데 하나가 중국에 등장한 한류(韓流)다. 원래 한류는 한류(寒流)와도 통하는 말로 처음에는 젊은이들의 외래문화 추종에 대한 경계로 사용된 말이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문화현상을 일컫는 말이 됐다. 앞으로는 서구문화와 직접 접속해 중국 문화를 외부에 발신하게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한국이 귀중한 문화의 변전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가와카쓰=일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국의 역할은 매우 크다. 신라.백제.고구려 등 한국의 영향을 빼고 일본 고대사를 볼 수 없다. 6~8세기 지배층의 30%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것이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 무사정권이 들어섰지만 기본적인 지식은 문사의 문화였다. 조선 통신사 등을 통해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 병마(兵馬)를 충효(忠孝)로 바꾸는 도쿠가와의 정치철학이 생겨났다. 다만 일본은 중국.한국과는 달리 서양문명에 대해 곧바로 문호를 열고 적극적으로 부국강병 정책을 받아들여 독자적 문명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대영제국, 그리고 패전 후에는 미국을 모델로 했다. 하지만 70년대 오히라 총리는 경제 자체가 목표인가에 회의를 갖고 문화를 내세웠지만 당시 일본은 아직 경제발전이 안돼 충분히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90년대 버블 붕괴 후 일본은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제 동물로는 세계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경제대국에서 문화를 키우자는 쪽으로 목표를 바꿨다. 일본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도 나왔다. 문화가 강조될수록 한국은 일본의 중요한 파트너로서 부상한다.

▶이=지금까지의 선택지는 대륙이냐 해양이냐, 독립(인디펜던스)이냐 종속이냐(디펜던스)의 이항대립적 택일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인터디펜던스(상호의존관계)라는 제3의 선택지가 생겨나고 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서로 전쟁을 하던 적대국들이, 그리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색깔이 다른 나라들이 유럽연합(EU)의 초국가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낸 것도 그런 흐름의 하나다. 서로 독립돼 있으면서도 문화적 동질성과 지리적 인접성을 토대로 지배.피지배관계가 아닌 네트워크를 만든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 순망치한의 윈윈관계의 전략, 인터링크드 이코노미의 글로벌 시장도 생겨나고 있다. 한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상생(相生)이라 불러왔다. 그러한 의식변화와 선택지에서 동북아시아 공동체(EAC)가 생겨날 수도 있다.

▶류=주변 문화의 특색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유교는 중심지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실현되고 지켜졌다. 과거의 한자와 고대어를 지키고 있는 것도 한국이다.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 문화풍습들이 한국에 남아 있는 것들이 많다. 온돌방도 음식도 건축양식도 그렇다. 같은 한국인데도 인천 같은 서북쪽 항구도시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분위기가 있고, 부산은 일본의 고베 항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 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적인 면, 생활습관도 양측의 모든 요소를 융합시키고 있어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한국에 오면 다같이 이화감을 받지 않는다. 일본.중국 사이의 이화감이 한국에 의해 해소되는 셈이다. 한국은 또 근대의 서구적인 문화도 갖고 있다. 일본의 목조건물에 비해 한국의 콘크리트 아파트는 서구의 도시를 연상케 한다.

▶이=20세기를 흔히 '극단의 시대'라고 한다. 이에 비해 21세기는 '균형의 시대'라고 말해진다.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줄타기 곡예사를 보면 안다. 한국의 문화 가운데는 좌우지간이나 양단 불락 같은 말이 있듯이 밸런서로서의 뛰어난 감각과 의식이 있었다. 서랍을 가리키는 일본말의 '히키다시'나 중국말의 '추체(抽)'는 모두 바깥으로 빼낸다는 일방적인 뜻밖에는 없지만 한국어만이 빼고 닫는 양면을 다같이 포함시켜 빼닫이라고 한다. 정보기술(IT)산업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 역시 '반도체 문화'라 할 수 있다.

▶가와카쓰=그렇다. 미래를 지배하는 힘은 밸런스다. 일본과 중국은 밸런서로서의 한반도의 독특한 역할과 힘을 인식하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자각해야 한다. 그것이 동북아 연대의 선결조건이다. 일본에서는 분국론이 대두되고 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분권체제를 이뤄냈다. 일본에선 지방 분권 운동이 활발하다. 한반도 역시 통일이 요구되지만 분권화의 문제도 중요하다. 동북아 전체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EU를 보면 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공유해가면서 분권 가능한 것을 인정하는 네트워크다. 중국 역시 통일을 강조하지만 분권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다. 홍콩.중국은 1국2제도다. 이렇게 분권 속의 통일을 하는 것이 로컬리제이션과 글로벌리제이션이 합쳐진 글로컬리즘의 흐름이다.

▶이=다르게,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분권과 통합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삼국이 다같이 가지고 있는 덕(德)의 문화를 밑받침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공통의 문화기반을 잃었다. 심지어 자신의 위치를 나타내는 동북아시아라는 말조차 서양식으로 북동아시아라고 말한다. 일본의 부국강병의 강병을 부국유덕으로 바꾼 분이 바로 가와가쓰 선생이다. 그러한 발상과 의식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을 변화시키는 상생관계를 만든다.

▶가와카쓰=세계 단위인 국제문화가 있지만 작은 단위로서의 지역문화도 있다. 자립해 있는 작은 곳을 연합하는 힘이 토러런스다. 에도시대는 분권화된 사회였다. 무력지배가 없어지고 사무라이는 번의 경영자가 됐다. 2백60개의 번이 서로 침략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일종의 국제적인 관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당시의 정치철학이 바로 덕치, 오늘날의 톨러런스였다. 그것이 한반도의 문화였다. 매너였다. 예였다. 한국은 예의국가였다. 예는 덕(德)이 겉으로 드러난 형태였다.

▶류=나는 동북아의 장래에 대해 특히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과거 한반도의 비극은 낡은 제국이 가고 새로운 제국이 일어나면서 생겼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는 갔다. 한반도는 중간성, 중간 위치를 이용해야 한다. 대륙.해양의 세력이 커질 때의 걱정을 말했지만 나는 중간적인 위치와 그 힘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양측을 견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역할이다. 양측을 받아들이고, 조정역할을 할 수 있다. 근대화 때는 한국이 양측에서 시달렸지만 이제는 거꾸로 경제.문화적으로 양측을 끌어들여 연결시켜야 하는 기회를 얻고 있다.

▶가와카쓰=유럽의 경우 라틴문화. 게르만 문화가 서로 대립했을 때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정상회담 등으로 모였을 때는 힘이 생겼다. 한.중.일도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에서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 도쿄.베이징은 어렵다. 서울이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것이다. 서울이면 어느 쪽도 마음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역할이 강해지면 일본과 중국의 대국끼리의 마찰을 중재하고 협상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2003년이 전쟁의 해였다면 2004년은 선거의 해라고 말한다. 미국과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스페인과 일본에서는 국회의 총선과 참의원 선거 등이 있다. 물론 한국은 4월에 국가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총선을 치르게 된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선거는 한국의 국운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세계에 변화를 주는 중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

<사진설명>
해체된 인기 댄스그룹인 H.O.T.의 재결합을 요구하는 중국 소녀팬들과(上), 지난해 6월 일본 영화 전문지 '키네마준보'에 소개된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주연 배우 장동건과 원빈.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인 '한류(韓流)'가 거세다.[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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