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해외 명서를 찾아|움베르토에코『장미의 이름』|중세말 비합리성통해 현대반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81년에 발표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전세계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출간되자마자 이탈리아 에서는 물론이고 40여개 언어로 번역 소개된 이 작품은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면서 수많은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기호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에코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친구로부터 간략한 추리소실을 한번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특징적인 것은 이 작품이 방대한 분량에다 박식함과 현학, 복합적인 사건들의 연루, 즐증적인 전개방식으로 내노라하는 식자층들에게도 난해하기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친구가 집필권유 그리하여 제목부터 시작해 이 소설과 관련된 여러가지 논쟁들이 제기되었고 결국 에코자신이 그에 대해 「주해」(우리나라에서는 『나는「장미의 이름」 을 이렇게 썼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수많은 찬사와 경탄을 받으면서 독자들의 끊임없는 탐험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미의 이름』은 독자들에게 고급스러운 책읽기의 재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 첫째요인은 추리 소설적인 스토리전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인 14세기의 어느 수도원에서 일주일 동안에 일어나는 일련의 살인사건을 치밀하게 추적해가는 과정은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기이하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동기 역시 강한 지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 대해 논하고 있는『시학』제2권의 유일한 필사본이 이 수도원의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가상적인 상황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희극 즉 인간의 웃음이란 하느님의 신성한 진리를 조롱하고 왜곡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생각에서 어느 나이든 수도사가 다른 수도자들이 그 책을 읽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중세말의 상황 특히 교황과 황제사이의 갈등과 종교적 논쟁이 장황스러울 정도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14세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근대가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중세는 감성과 감각에 의존한 시기였으며 비합리성과 신비·경이로움이 지배하고 물질보다는 정신이 우위에 서있던 시대였다. 다시 말해 14세기는 중세와 근대의 상반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던 과도기로서 중세를 지배하던 모든 것들이 이성의 차가운 논리앞에 힘을 잃고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그림까지 겉들여>
나이든 수도사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과 그에 따른 끔찍한 사건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한 수도자에 의해 해결된다는 이야기는 바로 근대 세계를 이끌어갈 이성의 결정적 승리를 암시한다.
바로 그 이성의 승리와 함께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세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우주와 인간의 현실은 이성과 논리만으로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장미의 이름」에 나타난 중세말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대를 반성케 한다. 이 소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가 지적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수도원의 도서관은 사건의 주요무대이자 하나의 상징적 세계로 제시되고 있다. 그 도서관은 당시에 수집가 능한 모든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진리의 집합체다. 또한 수많은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각 방들의 배치구조는 마치 미궁을 연상시킬 정도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어 에코는 언어로만 묘사하기에는 미흡한지 단면도까지 곁들이고 있다.
책으로 상징되는 진리의 세계는 바로 수도원의 도서관처럼 손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세계. 즉 복잡한 미로들로 뒤엉킨 세계다. 상징적으로 보자면 그 도서관은 인간 지식의 총체이자 동시에 미로처럼 복잡한 인간 세계 또는 우주의 간소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미로의 특징은 비록 아무리 복잡하고 찾기 힘들지라도 어디엔가는 분명히 출구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미로들의 세계, 하나의 미궁은 역설적으로 고도의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기도 하다.
미로찾기 놀이의 즐거움은 추리소설의 재미와 흡사하다. 그리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학문적 연구 및 그 구체적 산물인 책들의 방법론은 구조적 측면에서 보자면 미로찾기 놀이의 형식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도서관은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들로 충만한 곳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서관 및 그 안에 보관된 책들은 그 자체로서의 존재 의미이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가리킬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실체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무척 어려워지게 된다.
만약 어떤 기호 또는 이름이 수많은 것들을 가리킨다면, 그래서 그 모든 의미들을 완전하게 포착하기 어렵다면 실제로 그것은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미의이름』역시 그렇다. 장미라는 구체적 실체는 오로지 그「장미」라는 이름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장미라는 이름은 또 다른 수많은 의미들로 충만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공허한 이름이 되어 버릴수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름들이 갖는 한계성 또는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은 기호학자다운 에코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장미의 이름』을 가리켜「기호 온학의 소설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장미의 이름』(그리고 88년에 발표된 두번째 소설『푸코의 추』)은 에코의 모든 지적 역량이 총동원되어 소설이라는 양식으로 표현된 결과다.
자신의 소설에서 보여주듯이 에코의 연구 분야는 실로 엄청나게 다양하다. 미학의 문제에 대한 고찰들에서 시작하여 아방가르드 예술이론, 대중 커뮤니케이선의 문제, 건축기호학 및 시각 기호학, 현대의 기술문명과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다. 또한 백과사전적인 해박한 지식과 함께 에코는 고대 회랍어와 라틴어를 비롯하여 영어·불어·독일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등에 통달하고있는 언어의 천재이기도 하다.

<기호학의 소제화>
덧 붙여 말하자면 에코의 그러한 학문적 성과는 현재 그가 기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볼로냐 대학의 학풍과 무관하지 않다.
에코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강의와 저술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는 파리의 저명한「콜레주드 프탕스」에서 ∼인학년도 정규 강의를 맡고 있는데 강의의 테마는 「유림문화사에 있어 완벽한 언어의 탐구」로서 지금까지 쌓아올린 그의모든 학문적 성과들을 총망라하는 작업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지난해 9월30일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앞으로 4년4개월 4일 4시간 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97년2월3일 오후 4시에 자신의 세번째 소설을 발표할 것이라고 장담 하였는데, 앞의 두 소설에 대한 전세계의 반응과 성과로 미루어볼 때 세번째 소설 역시 기대해 볼만하리라. 김운찬 <효성여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