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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병과 책의 거리/이어령(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최근 닌텐도의 텔리비전 게임이 아이들에게 간질병을 일으킨다해 큰 화제와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간질병 같은 육체적 부작용이라도 일어나야 비로소 그에 대한 관심을 갖게되는 우리의 그 태도다.
닌텐도가 「슈퍼마리오브라더스」니,「드래건퀘스트3」과 같은 히트작품을 내 세계의 수백 수천만명의 어린이들이 텔리비전 게임을 즐겨온 것은 이미 10년전 부터의 일이다.
○정신적 질환엔 무관심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자기 자녀가 텔리비전 게임을 즐기고 있는 그 모습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의심스럽다.
간질병 같은 육체의 병에 대해서는 그렇게 민감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잠식하고 있는 정신의 병,마음의 질환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독서를 하지 않게 된 프랑스의 최근 풍토를 소개한 어느 외신에서도 가장 목청높여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 바로 닌테도게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1세에서 15세까지의 소년을 「게임보이 세대」라고 부른다. 작년에 닌텐도가 프랑스에서 판 패밀리 컴퓨터는 1백70만대인데 그중 80만대가 「게임보이」였다. 그리고 텔리비전 게임은 프랑스 장난감시장의 거의 반을 점유하고 있다.
이중에 간질병에 걸리는 아이는 몇%나 되는가. 그야말로 그 확률은 창해일속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게임보이 세대」가 걸려있는 활자기피증과 반독서병은 거의 1백%라고 봐야한다.
「책을 안 읽어서 죽은 귀신은 없다」고 낙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방적인 전자미디어로 인한 문화의 위기는 지금 거의 생명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로마제국이 망한 원인은 납으로 된 그릇을 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학자가 있다.
○독서기피증이 더 심각
인류의 멸망은 금세 눈에 띄는 핵폭탄이 아니라 납중독처럼 서서히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여가는 전자미디어의 중독에서 비롯될지 모른다.
지금까지 문맹은 후진국병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이것이 선진국 병의 하나로 부각하고 있는 것도 그 중독증세의 하나다. 미국의 문맹자는 현재 3천만명에 이르고 있고 유럽도 영국 2백만명,가장 적다는 서독이 30만명이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못쓰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농약병의 설명문을 읽지못해 그 중독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만만찮다.
TV니,닌텐도게임이니 하는 전자매체의 문화적 특성은 지루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있다.
조금만 재미없으면 TV채널을 돌려버리고 그 게임의 프로그램을 바꿔버린다. 『샹송 한곡을 듣는데 필요한 시간은 3분인데 3백페이지의 책을 읽는데는 3개월이나 걸린다.』 이것이 「게임보이 세대」가 책을 외면하는 변명이다.
그러니 이 말을 뒤집으면 활자문화의 특성과 그 귀중함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젊은이들의 성급하고 충동적인 생활속도에 제동을 걸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활자미디어를 읽는 훈련이다.
전자매체와 달리 책은 청량제가 아니라 천천히 씹을때 맛을 느끼는 음식과도 같다. 세계 어느나라보다 TV채널이 많고 그 방송시간이 긴 일본이지만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고 독서율은 제일 높다. 일본에는 책 읽기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지루한 것을 참고 견디는 다도와 꽃꽃이 같은 선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전자제품으로 번영하고 있으면서도 그 정신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가 있었다.
도쿄에는 아키하바라라는 세계에서 유명한 전자상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곳에서 얼마 안떨어진 간다에는 헌책과 새책을 파는 크고 작은 책방들이 즐비해 있는 「책의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다. 역설적으로 말해 간다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아키하바라의 문명이 있을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비정신」되살려야
금년은 「책의 해」다. 간질병에 걸린 것을 보고 놀랄 것이 아니라 「게임보이 세대」전체가 앓고있는 그 병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이 기회에 꼭 「책의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술집의 거리,오락의 거리는 많아도 책의 거리가 없는 서울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선비문화 6백년의 역사에 어울리는 책의 거리를 만들어 키워간다면 어찌 그 서울이 아카하바라와 간다를 부러워 할 것인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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