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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김병욱PD "누구도 이런 시트콤 다시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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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나 보았다. 8개월 간 숨가빴던 '발차기'를 끝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독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연인이 떠나는 기차시간처럼, 해거름은 무정하게도 성큼성큼 다가왔다. 12일 경기도 양평 한 시골분교 촬영 현장에서 이뤄진 김병욱 PD의 마지막 하이킥 순간을 동행했다.

#김병욱의 마지막 하이킥

그는 종일 바빴다. 요 며칠 잠을 하루 1~2시간밖에 못 잤다고 했다. 다음날이 마지막 방송인데, 오후 5시에 마지막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심지어 양평에서 찍은 당일 방송 분량을 오후 4시에 MBC 본사로 실어보냈다.

윤호(정일우 분)와 민정(서민정 분)이 우연히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해가 지기 전 촬영을 끝내야했다. "교탁 위에 민정이 핸드폰 올려놔!" "자~ 아주 슬픈 느낌이 아니고 1년쯤 지나 담담한 느낌!" 순박한 경주 사투리가 까칠한 작업반장의 호령으로 바뀌었다.

"아쉽죠. 늘 시간에 쫓겨서 제대로 못 만들어…. 다시는 이런 시트콤 안합니다. 아니 누구도 못합니다."

회한만큼이나 자부심이 배어있는 말. 그 말대로 13일 막을 내린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남긴 발자국은 진했다. 미스터리·멜로·코미디가 범벅이 된 이 '이종(異種)드라마'는 수많은 4자 캐릭터(야동순재, 식신준하, 꽈당민정 등)를 양산하며 인터넷 UCC(사용자제작콘텐트)의 최대 놀이감이 됐다. 시트콤으론 처음으로 9시 뉴스 직전 일일연속극 시간대에 편성돼 시청률 20%라는 괜찮은 '실적'도 남겼다.

이날 촬영장엔 전날 제주도에서 막 올라온 김범이 깜짝 방문했다. 김 PD의 얼굴에 반가움이 돌았다. "연기 폭이 넓다"고 칭찬하는 배우다. 김범 역시 감독과의 대화가 캐릭터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거름이었다고 했다. "평소에 절 보면서 느낀 점을 말씀해주시고, 저도 제가 욕심나는 것들을 말해요. 그렇게 쌓아가며 엉뚱하고도 의리 있는 '하숙범' 캐릭터를 구체화했죠."

#웃음 뒤 씁쓸함, '쿨한 코미디'

'김병욱표 시트콤'이란 브랜드가 생길 정도로 그의 작품엔 일관된 것이 있다. 3대 가족을 뼈대로 인물들의 사소한 권력관계를 탐구하는 것.

"가족이 코미디를 만드는 토대로 가장 편해요. 코미디란 게 권력 관계의 불화에서 발생하는데, 친구나 동료나 가족이나 동등한 관계는 없잖아요. 늙으신 부모님이 예전처럼 소리를 못 지르시는 이유는 자식에게서 용돈을 얻어쓰기 때문인 것처럼요.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포착해 웃음을 찾는 편이죠."

웃음 뒤가 씁쓸한 것도 '김병욱표 코미디'다. 영화감독 우디 알렌의 광팬이라는 이 남자는 사회에 대한 냉소를 한켠에 품고 있다.

"'파리의 연인' 같은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저러다 사랑이 변하는 걸 보여주는 쿨한 코미디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요. 우리나라 코미디는 너무 갈데까지 가는 경향이 있고, 비극은 너무 질펀해요. 그 중간쯤을 찾고 싶죠."

차기작 계획은 아직 없다. '하이킥'을 영화화하자는둥 제의는 많지만 일단 아무 생각없이 푹 쉬고 싶다고. 앞으로 만들 것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어떤 것. 매번 그의 시트콤이 진화해왔던 것처럼.

해질녘까지 계속된 촬영은 그래도 끝을 맺지 못했다. 남은 두 신(scene)은 새벽에 조감독에게 촬영하게 했다. 밤늦게 전화로 이어진 인터뷰 도중 "전작이었던 '귀엽거나 미치거나(SBS)'가 실패(조기종영)한 뒤 백수기간에 무얼 했나" 질문했다. 갑자기 껄껄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엽거나'가 저로선 첫 실패였는데, 그로 인해 갑자기 등진 사람이 많았어요. 방송가의 냉혹한 생리를 뼈저리게 깨달았죠. 노는 동안 영화 구상하고 있었는데, MBC에서 제안이 왔죠. 명예회복이랄까 복수랄까 그런 오기가 생겼는데 이젠 성공했으니…." 그는 다시 크게 웃었다. "그런데, 성공하고 나니 쭈뼛쭈뼛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가 왜 세상을 코미디로 풀어가는지 알 법도 했다.

양평 글.사진=강혜란 기자

(※ 기사 전문은 7월15일자 중앙SUNDAY 매거진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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