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시발언으로 투옥/민자 전국구 승계 유성환(의원탐구: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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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공정권 서슬에 정면도전/YS시련·공천 불운 겹쳐 고비마다 수난
□유의원 약력
▲경북 성주출신(62세) ▲영남대 법학과 ▲경북 도의회의원 ▲신민당 중앙위원 ▲12대의원 ▲14대의원
『민족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김영삼대통령 취임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이같은 말들이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살벌한 시절이 있었다.
『이나라 국시는 반공보다는 통일이어야 한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5공 군사독재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던 86년 10월 이 두마디 말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의원직을 빼앗겼던 유성환의원(62). 그가 지난 4일 6년여만에 국회의사당으로 돌아왔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발탁된 김영수씨의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한 것이다.
그는 이날 의원 등록을 위해 의사당을 찾았을때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한다.
『부모가 명절때면 피치못할 사정으로 타향으로 옮겨가야 했던 안쓰런 막내아들을 기다리듯 국회가 이같은 부모 심정으로 저를 기다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국회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잃었던 금배지를 되찾은 유 의원의 정치역정은 청년기의 짧은 한순간을 빼고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영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유 의원은 57년부터 고향 경북 성주에서 중·고교 교편을 잡다가 60년 4월 혁명후 사회대중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당시 민주당정권의 무능함에 실망,군소정당인 사회대중당을 선택했다고 한다. 같은해 12월 3대 도의회 의원선거때 29세의 연소한 나이로 경북지역에 출마해 당선,순탄한 정치인생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곧바로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지방의회는 해산되고 도의원직도 박탈당했다. 그는 설상가상으로 막불어닥친 구정치인 검거바람을 피하기 위해 잠시 피신해 있던중 돌이 갓 지난 첫아들을 손도 못쓰고 잃는 비통함까지 맛보아야 했다.
그는 검거선풍이 잠잠해지자 바로 신생 야당 신민당에 입당,정치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회의사당에 발들여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경북도당 법제부장때인 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첫 공천을 신청했으나 낙천한뒤 10대 선거까지 네차례나 연거푸 공천을 받지 못했다. 10대때는 참다못해 구미­선산­칠곡­군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는 도의원시절부터 김 대통령을 알았고 69년 11월부터는 가까이서 모셨으나 공천조차 받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하게 공천할 때면 YS가 나를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입장에 있었지요. 7대때는 내가 소장파인데다 현역의원과 경합했고 8,9대때는 김대중씨가 경북에서 딱 한곳만 달라며 다른 사람의 공천을 강력히 주장해 밀리고 말았습니다. 10대때는 YS를 경쟁상대로 삼았던 이철승씨가 총재직을 맡아 또 분루를 삼켜야 했어요.』
유 의원은 5공초 정치규제에 묶이는 바람에 11대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고 12대때인 85년에야 비로소 양김이 만든 신한민주당에서 대구중­서구지역 공천을 받을수 있었다.
그는 12대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 주자답게 당시 4선관록인 한병채 민정·이만섭 국민당후보를 누르고 1등 당선하는 감격을 누렸다. 그러나 정치다운 정치가 만개할 수 없었던 그시절은 야성이 강한 유 의원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86년 10월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나라 국시는 반공보다는…』라고 외친 유 의원을 북한 찬양·고무혐의로 잡아가두고 말았다. 그는 이 국시파동으로 금배지를 빼앗겼을뿐 아니라 1심에서 징역1년·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2백70일간 감방살이를 하는 등 다시 고초를 겪었다. 지금은 『헌법학원론』(권영성 서울대교수저)에도 의원의 면책특권이 부당하게 묵살된 사례로 기록된 국시사건에 대한 그의 회상.
『통일논의가 금기시 되면 통일은 요원하다는 충정에서 국시발언을 했습니다. 3년뒤에 서울올림픽이 열리는데 로스앤젤레스·모스크바 올림픽과는 달리 동서가 갈라지지 않고 남북한이 함께 참가하는 온전한 올림픽이 이뤄져야 민족화해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지요.
그러나 전두환정권은 금이 가기 시작한 체제유지를 위해 말도 안되는 억지로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87년 7월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재판에 계류중인 상태에서 88년 4월 13대총선에 당시 통일민주당 대구서을후보로 출마했으나 용공시비에 휘말려 민정당후보로 나섰던 최운지의원에게 패배했다. 그는 90년 3당 합당때는 자신에게 용공의 굴레를 씌운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도 했으나 보혁대연합이 시대적 조류라고 판단,YS뒤를 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공소기각 확정판결을 받아 용공누명을 완전히 벗었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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