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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51만평 기부“교훈”(문민시대 새교육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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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41년 연대에… 아들은 입학 손자는 못해
일제 말기인 1941년 연희전문(현 연세대)은 대학설립 및 운영에 관계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강제추방당한뒤 한때 학교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였다.
사정을 전해들은 경기지방의 대지주 김성권씨는 『돈이 없어 후세 교육에 지장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자기 소유의 안성·이천·청양 땅 51만평(당시 시가 50만원·80㎏들이 쌀한가마 22원)을 대학에 희사했다. 김씨는 『충분치는 않겠지만 애국청년들을 길러내는데 써달라』고 당부하면서 『다만 나중에 내 직계후손이 이 학교에 들어가기를 원할 경우 입학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학 관계자들은 흔쾌히 승낙하고 약속증서를 써주었다.
대학은 대부분 논과 밭으로 되어 있는 그 땅의 연간 소작료 수입(2만원 상당)으로 당시 대학 운영비 결손액의 대부분을 메울 수 있었고 현재 명문 연세대 기틀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대학측은 김씨의 고마운 뜻을 기려 교내에 건물을 짓고 김씨의 호를 따 성암관이라 명명했다. 현재 본관 뒤편의 국제학 대학원건물이다.
광복이 되고 김씨도 세상을 떠난 1950년대 백낙준 총장시절 김씨의 아들이 연세대 입학을 희망,대학측은 약속대로 정외과에 입학시켰다. 학생선발권이 대학측에 일임돼있던 때여서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80년후반 김씨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기부증서를 들고 대학 관계자를 찾아왔다. 그러나 대학측은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교육부가 학생선발권을 행사하는 이상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세희 총장은 「은인의 손자」를 입학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며 청와대 등 요로를 찾아다니며 읍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크게 낙심한 김씨의 아들과 그 부인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면서 미안해 어쩔줄 모르는 대학 관계자들과 헤어졌다.
『애 할아버지는 비록 후손에 대한 입학혜택이 없었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기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인 우리로서는 인간이 모자란 탓인지 약속이 더이상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참으로 서운합니다.』
연세대 사례는 사학 재정난 해소책의 하나로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여입학제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학의 재정난은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빚어진 결과다.
사학측으로서는 『일단 설립만 되면 어떻게 꾸려나가겠지』하는 식의 설립단계에서부터의 무사안일에다 재단 및 경영진측의 자구노력 소홀책임이 있으며 교육당국으로서는 사학의 자주성과 공공성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행·재정적 지원은 커녕 오히려 억압·통제적 자세를 보여왔다. 게다가 학부모·기업 등 사회적으로도 당장 큰 생색이 나거나 큰 이익이 보장된다면 모를까 장기적 안목의 사학 지원·육성에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 일부대학에서 총장 지휘아래 동문·학부모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 뒤늦게나마 자구책 강구에 나선 것은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으나 효과를 거두려면 마키팅기업 개발 등의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아들이 입학한 대학으로부터 등록금 고지서와 함께 학교채 구입의뢰서를 받아든 한 학부모가 『몇십만원이나 되는 돈을 사실상 공짜로 달라는 구입의뢰서가 딱딱한 명령투 문장으로 꾸며져 있어 선뜻 사줄 마음이 생기지 않더라』고 토로한 것은 대학운영에 경영기법 도입의 시급성을 말해준다.<김동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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