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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목민을 위한 맹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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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아프리카 장관이 아시아 국가를 방문했다. 아시아 장관이 그를 집에 초대했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대저택이었다. 아프리카 장관이 물었다. “당신 월급으로 어떻게 이런 집에 살 수 있소.” 아시아 장관이 전망 좋은 테라스로 그를 데리고 가 멀리 새로 지어진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다리가 보입니까.” “네.” 아시아 장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10%요.” 일 년 뒤 아시아 장관이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아프리카 장관은 훨씬 호화로운 궁전에 살고 있었다. “당신 월급으로 어떻게 이런 집에 살 수 있소.” 아프리카 장관이 그를 테라스로 데리고 가 지평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다리가 보입니까.” “아니요.” 아프리카 장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00%요.” 제3세계의 도둑 정치를 빗대 세계은행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머란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하는 얘기다.

 그야말로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구가 3만3000명, 재정자립도는 10%를 겨우 넘는 한 군의 역대 민선 군수 3명이 줄줄이 포승에 묶였다. 모두 비리 혐의다. 한 사람은 공사 특혜를 주려고 공문서를 위조했고, 또 한 사람은 건설업자한테 “공사 대가로 2억원을 주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다른 사람은 서기관 승진에 5000만원, 사무관 승진에 3000만원씩 받아 ‘서5사3’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 냈단다. 참으로 ‘징한’ 사람들이다. 전임자가 구속되는 바람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 챙겼다. 전임자 구속을 보고도 배운 게 없는 걸까. 아니면 ‘어찌 그리 서툰가’ 비웃은 걸까.

 후자라면 더 딱하다. 다산 정약용이 오래전 경고했는데 말이다. 『목민심서』에서다. “뇌물수수를 누가 비밀리에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밤중에 행한 것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아전들이 “퍼뜨리면 자기에게 해가 될 텐데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라고 목민관을 부추기지만 문밖을 나서자마자 어김없이 떠벌려 자기 과시를 하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에 퍼진다는 얘기다. 목민관만 바보가 된다.

 전자의 경우라면 심각한 문제다. 구조적 비리를 의심할 수 있어서다. 흔히 ‘관례’라 일컬어지는 부조리들이다. 하지만 뇌물 주고 공사 따낸 사람, 돈 바치고 승진한 사람은 어디서 그걸 벌충하겠나. 뇌물로 허물 잡힌 상사가 아랫사람의 허물을 지적할 수 있겠나. 저들끼리 “좋은 게 좋은 것이여”라며 배 두드리고 있을 때 죄 없는 국민만 허리가 휜다.

 다산은 그 경우도 짚어 경계했다. “그릇된 관례는 고치고 혹 고치기 어려운 것은 나 자신만이라도 범하지 않는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지만 워낙 뿌리 깊고 견제가 심해 그럴 수 없더라도 목민관은 허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서울의 몇몇 구청에서처럼 출장 간 사람이 집에서 자고 있고, 밤에 산책 삼아 회사 나와 야근부에 도장 찍고 가는 일을 눈 감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다산은 “청렴하지 않으면 목민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 공직자들이 모두 다산처럼 성인일 수야 없지 않겠나.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주민소환제가 능사가 될 순 없겠다. 자칫 의욕적으로 일하는 단체장들의 발목을 잡고 의욕을 꺾을 수 있어서다. ‘목민을 위한 맹세’를 만들면 어떨까. 그래서 중앙과 지방 공직자들이 매일 아침 가족 사진 앞에서 외우게 하는 거다. 맹세를 한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 없지만 그래도 부모·자식 앞이라면 조금이나마 거리낌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애꿎은 국민만 국기 앞에 충성을 강요하지 말고 공직자들이 청렴 맹세를 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한 지름길이 아닐는지.

 “나는 사랑스러운 자식과 후손에 자유롭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 공정과 청렴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