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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그 뜨거웠던 ‘5월 광주’ 오늘의 정서로 태어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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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5월 광주’가 상업영화로 처음 완성됐다. 26일 개봉하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다. 1980년 5월,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학생들이 살상당한 비극이 벌어진 지 27년 만이다. 그동안 충무로에 ‘꽃잎’(1996년), ‘박하사탕’(99년) 등 5·18의 상처를 다룬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우회나 회고에 가까웠고, 가해자든 피해자든 죄의식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사실 5·18은 너무나 극적인 소재. 그래서 더 상업영화로 만들기 힘들었다. 폭압적 시대를 재현하면서도, 역사와 사회에 관심이 적은 관객들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적 장치가 고루 필요했다.

멜로와 액션의 공존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열흘 남짓한 기간을 다룬다. 특히 제작비가 100억원에 육박하는 대작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제는 말해야 한다’는 투의 소재적 무게감을 넘어 2007년 오늘의 관객을 흡입하겠다는 지향이 뚜렷하다. 한국 현대사의 거대 비극을 지금의 젊은 관객들도 동시대적 정서로 십분 체감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평범한 주인공이 피붙이를 잃는 비극은 공들여 편집한 총격전의 강렬함과 함께 재현된다. 계엄군이 집단발포하는 금남로, 시민군이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전남도청 등을 광주 첨단산업기지 부근에 30억원대 세트로 지어 촬영했다. 주인공들이 형과 동생, 아버지와 딸, 수줍은 청춘남녀로서 주고받는 정은 이들이 비극의 피해자 이전에 온기가 흐르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실화의 비극을 소화하기 쉽게 멜로와 액션으로 감싼 점에서 일종의 당의정 같은 영화다. 이 영화가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영화 속의 시간은 당시 사건일지를 비교적 충실히 따라간다. 주요 캐릭터 역시 택시기사·고교생·퇴역군인·간호사 등 당시를 돌아볼 때 예외 없이 등장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되, 다만 이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영화에 맞게 재구성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중에 소위 지식인은 없다. 대학생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애가 끓는 어머니(나문희)나 신군부의 의도를 비유로 설명하는 동네 신부(송재호)가 등장할 따름이다.

정치 대신 일상 이 같은 탈이데올로기적 지향은 초반부의 일상에도 뚜렷하다. 부모 없이 자란 택시기사 민우(김상경)는 서울대 법대를 지망하는 남동생 진우(이준기)를 뒷바라지하면서,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를 흠모하는 중이다. 입담 센 동료 택시기사 인봉(박철민)과 속칭 양아치 용대(박원상)는 여기에 웃음을 톡톡히 더한다. 이들의 삶은 지극히 평화롭고 아기자기하게 묘사된다. 예비역 대령 흥수(안성기)가 군인들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울 뿐, 대부분 인물이 사건 직전까지 격변의 정치사회사와 무관하게 그려진다. TV에서는 뉴스보다 ‘전설의 고향’이 관심사고, 전남대생의 시위를 지켜보며 발길이 향하는 곳은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가 걸린 극장이다. 자연히 영화의 줄거리는 선량한 보통사람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맞서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고교 동급생의 죽음 직후 시위에 나섰던 진우에게 벌어지는 비극은 택시기사 민우가 총을 들도록 만들고, 계엄군에 쫓겨 골목길을 달리다 겪는 극한적 상황은 간호사 신애가 내내 시민군 곁에 머물게 한다.

역사와 흥행 사이 인상적인 장면 둘을 꼽는다면, 전반부는 계엄군의 집단 발포다. 계엄군의 철수를 예상하고 기대에 부풀었던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지며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배경에는 낮 12시에 맞춰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자연재해도, 민간사고도 아닌 이 비극의 성격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후반부는 민우와 신애의 이별이다. 캄캄한 바깥과 달리 빛이 환한 터널에서 이들은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만남을 기약한다. 시대적 비극에 수반된 개인의 비극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현대사의 뜨거운 실화를 상업영화로 소화하면서, 이 영화가 놓쳐버린 대목도 적지 않다. 5·18의 함의든, 상업영화의 독창성이든 부족한 점을 찾기도 어렵지 않다. 그래도 ‘5월 광주’를 모르고 자라온 요즘 세대에게는 앞선 시대의 깊디 깊은 슬픔을 돌아보는 참고서의 역할은 충분하다. 교과서까지는 몰라도 말이다. 12세 관람가.

이후남 기자


쉽지 않은 소재다.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다. 5·18이 폭도의 반란인 줄로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진상을 알게 됐다. 부끄러웠다. 몰랐던 것보다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부끄러웠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앞선 세대보다 5·18에 대한 죄의식·부채의식은 덜할 것 같다.

“치열했던 그 세대보다 혜택을 받은 세대다. 자유롭고 행동반경이 넓다. 과거에는 현미경으로 세상을 봐야 했다면 우리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세대다. 환경은 좋아졌지만 소통의 문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은 계속 생겨난다. 5·18 당시 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서로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려던 사람들의 마음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런 점을 다루고 싶었다.”

광주가 무대이면서도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표준말을 쓴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광주 분들을 만나면, 많은 관객이 보게 해달라고 하시곤 했다. 광주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 전체의 아픔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자칫 서투른 사투리가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봤다.”

비극의 가해자인 신군부 세력, 미국의 역할 등은 스쳐가는 수준으로만 언급된다.

“그 가해자는 사회적·법률적으로 이미 단죄를 받았고, 복권도 됐다. 그걸 다시 한번 얘기하면 무겁고 딱딱한 드라마가 될 것 같았다. 복권이 되면서 광주의 아픔이 오히려 박제화되는 측면이 있다. 사건보다 사람 위주로, 27년이 지난 지금의 관객들이 그때의 그분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할 수 있게 다루고 싶었다.”

실화가 배경이라 힘들었을 텐데.

“감독이 주관적이 되면 안 되는데, 유족들을 만나면서 너무 슬펐다. 영화를 찍는 동안 내 첫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 생각만 하면 당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의 아픔이 떠올랐다. 김상경씨가 연기하는 장면에서 울음이 안 그쳐 커트를 부르지 못한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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