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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편 7개월만에 공직복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다행이다 싶어 1차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조치사항 건의를「박세직 불문, 이규환 미국 행」으로 적어 넣었어요. 그즈음(81년 7월말)전대통령은 진해로 여름휴가를 가 계셨습니다. 나는 나대로 사령관에 갓 취임(7월15일)한 터라 지방 보안부대를 초도 순시해야 했어요. 광주로 떠나면서 보고서를 지참했습니다. 광주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마산지구를 순시한 뒤 서울에서 조사 받던 박 장군을 불러 함께 진해휴양지로 가서 조사내용을 보고하고 읍소 하면 무난히 용서될 것으로 생각했어요. 첫날 광주에서 묵는데 밤중에 숙소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급한 청와대 호출>
보안사령부에서 걸려 온 전화는 뜻밖에도『각하께서 일정을 앞당겨 귀 경했다. 오자마자 사령부에「박세직 건을 지금 당장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사령관 대신 대공처장(김 모씨· 대령예편)이 보고하러 청와대에 올라갔으니 가급적 빨리 귀 경 하시라』는 내용이었다.
박 전 보안사령관의 계속되는 회고.
『다음날 새벽에 헬기로 상경하려 했으나 때마침 비가 퍼부었어요. 승용차로 대전까지 가서 대전에서 헬기 편으로 상경했습니다. 아침에 청와대에 들어가니 국방장관(주영복)·참모총장(이희성)도 와 계시더군요. 대통령께서 대단히 격앙돼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습니다.「박세직 이를 당장 옷을 벗기겠다」는 것이었어요.「각하, 선처해 주십시오. 정 그렇다면 부군단장쯤으로 내보내는 게 어떻습니까」고 자꾸 사정을 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주 장관이 내 바지 깃을 슬쩍 당기며 눈치를 주더군요. 그래서 대통령 앞에 놓인 서류를 보니 이미 「예편조치」로 사인까지 나 있었습니다. 일이 끝났구나 싶더군요. 최고통치자가 결재까지 했다면 더 이상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겨우「수경사에서 전역 식은 치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건의를 했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하라는 허락이 떨어졌어요. 그후 친구로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역 사를 써 준 것과 전역 식에 참석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날 청와대 보고석상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당시보고 과정에 참석했던 A씨의 증언.

<불리했던 부하 증언>
『사령관 부재중 청와대의 갑작스런 지시를 받고 저녁에 출두한 보안사 대공처장이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게다가 보고할 내용도 채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규환이 접촉한 군 인사들의 이름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대통령은「이 놈도 만났구나. 아니, 그놈도 접촉한 거야?」라며 화를 냈어요. 전대통령은 과거 수경사30대 대장시절 이웃 33대 대장이던 이규환씨를 잘 알고 있었고, 그가 비리에 연루됐다는 점 때문에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사실 이규환이 만났던 옛친구들 중에는 박준병 사령관도 포함돼 있었어요. 지금 국회의원인 윤 모씨, 중장으로 예편한 이 모씨 등도 그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우리 사령관 님도 만난 적 있습니다」라고 이실직고하면 간단할 것을 겁이 났던지 보고하지 않았어요. 동기생이라 만났을 뿐인데 말입니다. 전대통령이 그 눈치를 모르겠습니까. 결국 대통령의 불신만 산 끌이 돼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전대통령은 수경사의 영관 급 장교 두어 명을 차례로 불러 만났어요. 최종결심을 하기 전에 박 장군 직속부하들의 의견을 구한 거지요. 지금은 군 고위장성이 된 K씨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부하들의「보고」가 박 장군에게 불리한 쪽이었어요. 출근이 늦고, 관사에서 사람들만 만나고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박세직씨의 스타일을 이해 못한 판단이었을 겁니다. 오밤중에 순시를 밥먹듯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조깅하고, 장소 안 가리고 사람들 불러 일하는 게 박 장군의 방식이라 보기에 따라서는 독선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하튼 전대통령은 점점 결심을 굳히게 됐지요. 자정 가까운 시각에 보안사에 전화를 걸어「수경사령관을 내일 당장 예편시킨다. 보안사로서는 별도조치를 할 필요가 없다. 장관과 총장에게는 내가 직접 지시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자정 넘어 아마 새벽2시쯤으로 기억됩니다만 국방장관·참모총장에게 예편시킬 준비를 갖추고 아침에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지시했어요.
A씨는『대통령의 분노가 커진 데는 보고과정의 혼선도 있지만 당시 갓 출범한 5공 정권의「강박관념」도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고 분석했다.
『「깨끗한 정부」를 한창 강조하면서 사정활동이 매서울 때였지 않습니까. 정통성을 그 방면에 의지하려는 분위기였어요. 특히 사건직전인 81년6월 전대통령은 아세안 5개국을 순방하다가 필리핀에서 충격적인 일을 목격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주최하는 환영만찬석상에 참석한 필리핀 고위인사들이 만찬장의 웨이터들에게 뇌물 10달러씩을 내고 포도주를 얻어먹더랍니다. 그 정도로 부패했다는 겁니다. 한국은 절대 저 꼴이 안되도록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전에「자리」지시>
박세직 장군은 예편후 불과 7개월만에 한전부사장으로 재 등용(82년 3월)된데 이어 안기부2차장, 총무처·체육부장관, 올림픽조직위원장 등을 차례로 거쳤다.
82년 3월 당시 동자부 장관이던 이선기씨(64)는『전대통령이 한전에 박 장군의 자리를 알아 보라」고 지시하면서「사실은 그 친구가 총장 감인데 도중에 불행하게 됐어.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라고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말한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12기「3박」중 박희도씨는 그후 참모총장을 지냈다. 나머지 두 명은 현역 국회의원이다. 묘하게도 두 박 의원은 12년 전의 이 사건에 대해『아직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해 보지 못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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