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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영화 한 시대가 저물다 '에드워드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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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10면

1980년대 들어 세계 영화계에서 동아시아 영화가 점점 퇴락할 때 홍콩과 대만은 단숨에 나타난 새로운 주역이었다. 홍콩은 과거에도 상업영화의 전통이 있었으니 80년대의 급성장이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만 영화라니? 이는 아무래도 낯선 경험이었다. 대만은 ‘총통’이라는 세습 정치 지도자가 여전히 존재하던 나라였다. 영화라는 문화가 꽃피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영화계의 변방 국가인 대만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데는 소위 ‘대만 뉴웨이브’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다. 대만의 억압적인 현대사와 그런 현재를 잉태한 굴곡의 과거사가 리얼리즘의 양식 속에 새롭게 해석됐다. 이 운동을 이끈 리더 격인 감독이 지난달 29일 타계한 에드워드 양(1947~2007)이다. 그는 현대사를, 그리고 그의 영화적 동지인 허우샤오셴 감독은 근대사를 천착하며 대만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단숨에 세계 영화지도 속에 그려 넣었다.
 
아시아 영화의 큰 별 지다
에드워드 양은 외국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동양 남자의 당당함, 때로는 당돌함이 돋보였던 감독이다. 지금이야 탈식민주의 등으로 서구 중심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이 많이 확산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서구 앞에 서면 왠지 주눅이 들던 때였다. 그는 자신의 조용하고 느린 영화 형식을 놓고 서구의 영화학자들이 이탈리아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비교할 때면 “공부 좀 더하라”는 등 콧방귀를 뀌곤 했다. 그 특유의 냉소를 띠며 이런 말을 내뱉을 때면 순간이나마 말의 카타르시스가 전달되곤 했다. 이젠 영리한 눈빛에 냉소를 지으며 촌철살인 같은 말을 해대던 당당한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미국 유학 생활에서도 그만의 당돌함이 엿보인다. 양 감독은 원래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전공을 살려 시애틀에서 직장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영화에 투신하기로 작정한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감독은 영화의 명문으로 소문난 남가주대(USC)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뉴욕대와 더불어 지금도 미국 영화 관련 대학에서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와 별 관계없다는 이유로 중간에 그만둬 버렸다. 그러고는 10여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대만으로 훌쩍 날아온다.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첫 장편이 1983년 발표한 ‘해탄적일천’이다. 여성 심리를 다룬 멜로드라마다. 데뷔작을 만들 당시 모여든 영화적 동지들이 바로 ‘대만 뉴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자기와 동갑이었던 허우샤오셴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왕자웨이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도일에게 이 영화의 촬영을 맡겼다. 시나리오 작가는 우옌젠인데, 그는 에드워드 양의 영화 중 우리에게 유일하게 극장에서 소개된 ‘하나 그리고 둘’(2000)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우옌젠은 허우샤오셴의 출세작인 ‘비정성시’(1989)의 시나리오도 썼다. ‘대만 뉴웨이브’가 일회성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작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새로운 ‘영화집단’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멜로드라마에서 빛나던 슬픔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데뷔작처럼 멜로드라마에서 빛난다. 특히 그의 ‘가족’ 멜로드라마에는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깊은 슬픔이 들어 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영화인은 그의 최고작으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을 꼽을 것이다. 김기덕의 ‘숨’(2007)에 나왔던 장첸이 소년 배우로 출연했다. 감독이 들으면 또 냉소를 보내겠지만 니컬러스 레이의 ‘이유 없는 반항’(1955)이 떠오르는 10대들의 고통스러운 성장영화다. 네 시간이 넘는 긴 드라마 속에 대만의 현대사와 그 현대사에 짓눌린 개인의 비극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 개인의 순수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행한 정치·사회적 조건에 의해 비틀어지기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들이 스크린 위를 표류한다. 어찌나 우리의 못된 현대사와 겹치는지, 그래서 고통의 내용도 어찌나 비슷한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입시문화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 숨막히는 차별과 억압, 그런 억압에 짓눌린 폭발할 것 같은 분노, 여전히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고문하는 정치적 후진성 등 이게 대만사인지 한국사인지 혼동될 정도다.
서구 문화에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국수주의적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대만 뉴웨이브’ 인물 중에서 에드워드 양이 가장 서구적이다. 그의 문화는 동양이라기보다 서양에서 길러졌다. 이를테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까닭 모를 슬픔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구슬픈 노래 속에서 배가됐다. ‘하나 그리고 둘’에 등장하는 오페라 아리아와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등은 드라마의 호흡을 길게 끌고 갈 때 연주되는 식이다.
‘하나 그리고 둘’이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다. 뒤늦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 서구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동료였던 허우샤오셴은 이미 1989년 ‘비정성시’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후배 격인 차이밍량도 1994년 ‘애정만세’로 베니스에서 역시 황금사자상을 받은 뒤였다. ‘대만의 트로이카’ 중에서는 가장 늦게 세계에 등장한 셈이다. 이 영화도 가족 멜로드라마다. 놓쳐 버렸던 아름다운 과거를 후회하며 사는 우리의 일상과 매우 닮은 평범한 이야기다. 그런데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에 놓인 사람들의 사소한 안타까움이 우리를 울린다.
그는 최근 ‘바람’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만화를 보고 자란 사람으로서 만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그가 또 어떤 슬픔을 그려낼지 참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보기 어렵게 됐다.
당당한 냉소와 달리 그의 가슴에는 큰 슬픔이 늘 자리했다. 아마 너무 슬픈 감정을 숨기려고 그는 호탕한 웃음을 보였는지 모르겠다. 영리하고 당당한 소년 같은 이미지 때문인지, 그는 대만에서 참 많은 사랑을(특히 여성들로부터) 받은 행운아였다. 아마 ‘저쪽’에서도 여전히 사랑받으며 웃음 짓고 있을 것 같다. 

사진 ‘씨네21’ 손홍주 기자

LIFE HISTORY
에드워드 양은 194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대만으로 이주했다. 어릴 때 일본 만화를 좋아했다. 플로리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뒤 한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다. 81년 대만으로 돌아와 TV 프로그램 몇 편을 연출한 다음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 중 ‘갈망’을 만들면서 오랫동안 매혹되었던 영화에 뛰어들었다. 그는 곧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선두그룹의 일원이 됐다. 한 가족의 역사를 담은 ‘하나 그리고 둘’로 2000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공포분자(1986년)
대도시를 부유하며 새로운 관계와 만남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사진을 찍는 청년과 그 여자친구는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소설가는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녀의 장난전화를 받고선 옛 연인과 바람을 피운다. ‘쇼트 컷’처럼 인물들이 느슨하게 스쳐가는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년)
열네 살짜리 소년이 여자친구를 살해한 실화를 소재로 삼은 영화. 이 사건은 대만에서 최초로 일어난 미성년자 살인사건이기도 했다. 야간학교에 다니는 샤오스는 ‘소공원파’와 어울리며 별다른 꿈이나 희망 없이 살아간다. 어느 날 샤오스는 밍이라는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밍은 ‘소공원파’ 두목이었던 하니와 사귀고 있었다.

하나 그리고 둘(2000년)
NJ는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 있다. 아내는 삶이 공허하다면서 요양을 하러 떠나고, 사업 파트너와는 결별했고, 차버린 지 3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난다. 삶이 만만치 않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NJ의 딸 틴틴은 사귀던 여자에게 돌아가버린 연인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고, 여덟 살짜리 아들 양양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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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씨는 미술과 몸을 섞은 영화 이야기『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로 이름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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