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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처리 지켜보며 「손익」계산/정주영대표 일본서 왜 안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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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검찰기소 늦추자 귀국 연기… 겉으론 “휴식”/처벌수준 파악후 정계 은퇴여부 결정할 듯
큰 싸움 뒤안에는 승패의 갈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패자간에도 명암이 짙게 갈린다. 대선의 패자중 한사람인 김대중씨는 적지 않은 갈채속에 새로운 삶을 찾아 26일 영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또다른 패자인 정주영국민당대표는 특별한 일도 없이 외국에서 돌고 있다.
정 대표는 지난 17일 『24일이나 25일께 돌아오겠다』는 기약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그는 23일 변정일대변인을 일본으로 불러 『2월3일 귀국하겠다』고 했고 29일 있을 소속의원(윤항렬) 장례식에도 불참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나 국민당 당직자들은 한결같이 「휴식」을 위한 장기체류라고 하나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비밀출국 시도가 좌절되고난뒤 정 대표가 법무부에 출국금지 해제를 요청한 이유는 「미국 클린턴대통령취임식 참석」이었다. 그러나 정 대표는 취임식에 공식 초청받지 않았을뿐 아니라 당초 국민당의 취임식 참석자 명단에 들어있지도 않았었다. 정확히 말해 정 대표는 취임식을 위해 미국에 간 것이 아니라 외국에 나가기위해 취임식에 참석한 셈이다. 따라서 취임식이 끝났다고 곧 귀국하지 않으리란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 대표는 지금까지 휴식을 위해 해외에 장기체류한 적이 없다. 주위에서는 『정 대표는 체질상 쉰다고 하더라도 오래있지는 않는다. 길어봤자 외국체류기간은 열흘을 넘긴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번엔 벌써 열흘을 넘겼고 예정대로(2월3일) 온다고 해도 아직 1주일이 남았다. 필경 곡절이 있을 것이다.
정 대표는 검찰의 1차 소환장이 나오던 시점에 비밀출국을 시도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검찰의 기소여부와 사법처리방향을 지금 지켜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검찰이 당초 설날이전 기소하려던 방침을 1주일 늦추자 귀국일자도 자동 연기된 것이다.
정 대표는 2년전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을 때 『눈이 올때는 쓸지 않는다』고 말해 화제가 됐었다. 정 대표는 그때보다 지금을 더 폭설이 퍼붓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쓸어도 쓸어도 맞을 수밖에 없는 눈이라면 무작정 쓸 것이 아니라 눈이 그치고 난뒤 「쓸 것인가,말 것인가」부터 결정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아예 쓸기를 포기하는 것도 한 방책이 될 수 있다.
검찰의 사법처리는 폭설이상의 중대한 사안이다. 흔히들 금고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국회의원자격을 상실한다는데 주목한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정 대표가 의원직뿐 아니라 정당원 자격까지 잃게된다는 점이다.
정당법상 정당원은 국회의원선거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선거법상 「금고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집행이 만료되지 않거나,형집행을 받지않기로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선거권을 갖지 못한다. 기소되어 유죄가 선고되면 정 대표는 국회의원도,정당대표도,당원도 아닌 상태가 되고만다. 최악의 경우 정 대표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재계로 돌아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정 대표는 이미 여러 동원가능한 인맥과 정보망을 동원해 검찰의 처벌의지,김영삼 차기대통령의 결심을 면밀히 체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구속기소방침이 확정될 경우 그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업무상횡령)」과 「대통령선거법(특수관계를 이용한 선거운동)」 위반이다. 전자의 경우 5년이상의 중형이며,후자의 경우도 3년이하의 실형이 가능하다. 숨어다니는 이병규특보가 붙잡히거나 자수하면 거의 유죄를 피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게다가 김 차기대통령은 측근중의 측근인 서석재의원까지 읍참마속할 것이란 설이 있어 정 대표는 자칫 눈쓸기를 포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제 정 대표는 「눈을 쓸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해야할 벼랑에 서있다. 그의 일본 구상도 당연히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정 대표는 『당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누차 강조해 왔지만 국민당의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아직 취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선직후 감원한 사무처직원을 한차례 더 감원한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정 대표는 눈이 쓸 수 없을 정도로 쌓였다고 판단하거나 눈을 쓰는 노력을 다른 곳에 쏟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쓸기를 포기할 것이다.
반면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그나마 지금까지 투자한 정치자산을 거두고,나아가 새로운 잉여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면 귀국해 새롭게 당을 정비해나갈 것이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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