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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로 가야 하나] 1. 김수환 추기경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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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004년 갑신년(甲申年)-. 지난해의 묵은 때를 털어내고 새로운 정신으로 한 해를 맞이해야 할 시기다. 극도로 대립했던 정치, 바닥을 헤맸던 경제, 좌우로 요동쳤던 사회 등은 모두 과거지사로 돌려야 한다. 대신 뿔뿔이 흩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대통합의 정신으로 지구촌의 무한경쟁을 헤쳐갈 지혜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새해 기획 '한국, 어디로 가야하나'를 통해 각계 지도급 인사가 건강한 미래를 향해 던지는 고언과 충고를 들어보기로 한 것은 이 때문. 그 첫 회로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둥이라 할 김수환(金壽煥.82)추기경을 본지 봉두완(奉斗玩.69)고문이 방문했다.

▶봉두완=새해입니다. 지난해엔 사회 전반에 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새해에는 온 국민이 마음 편하게 살고, 또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없을까요.

▶추기경=우리는 언제든지 희망을 갖고 삽니다.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마음 속에 갖고 있습니다. 서로 위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마음에 맺힌 걸 풀 줄 아는, 그런 인간적인 삶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건 막연하게 바라선 되지 않습니다.

▶봉두완=어떻게 해야죠.

▶추기경=지난 성탄 때 어떤 분으로부터 뜻 깊은 카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남을 위한다, 사랑한다, 도움을 준다는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마음에서부터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작심했다는 겁니다. 저도 좋은 생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가자고 했죠. 우리는 평소 자기의 기준으로 남의 점수를 매기잖아요.

▶봉두완=그렇죠.

▶추기경=그런데 후하게 점수를 매기지 않고 늘 단점을 강조하는 게 문제입니다. 내 스스로 반성해도 그래요. 그런 마음부터 없앨 때 남을 새롭게 대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존경하고, 인간 존엄성도 생각하게 되죠. 그러면 인간 관계가 자연스럽게 달라지고, 인간 관계가 달라지면 좋은 내일도 함께 옵니다.

▶봉두완=연말에 바쁘셨죠. 서울 구치소에서 성탄 미사를 드리고, 송두율.박지원씨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치권 인사가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이래서 될까요.

▶추기경=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함께 걱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죠. 요즘 정치가 극도로 어지러운 건 그 전에 어지러웠던 게 중첩돼서 그렇습니다. 엄청난 정치 자금이 왔다갔다 하니까 놀랐지만, 처음 아는 일은 아닙니다. 아니면서도 겹치니까 충격이 크고, 미래가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자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지금은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때다, 그런 무언의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늘 말하듯 위기는 동시에 기회입니다.

▶봉두완=보름 전 타계한 정치인 김윤환씨와 절친한 사이라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게 정치를 안 하길 잘했다고 위로하는 겁니다. 정치하는 게 잘못된 겁니까. 누군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추기경=해야죠.

▶봉두완=깨끗하다는 사람은 정치를 멀리하고, 정치하는 사람은 형무소를 가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추기경=그러니까 정치에는 권력이 따르지 않습니까. 권력의 본질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건데, 권력에는 그것을 남용해 국민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쓰고 싶은 유혹이 끼어듭니다. 그런 것과 돈이 연결되니까 부패가 생기고, 그게 커지다 보니까 수백억원의 뒷돈이 오고가는 사태가 빚어진 겁니다. 당사자 한사람이 본래 나쁜 게 아니고 잘못된 정치 풍토가 돈냄새 가득한 정치를 만든거죠. 부정했던 사람도 개인으로 돌아가면 착한 사람이 됩니다. 교도소에 가면 알 수 있어요.

▶봉두완=그래서 성탄절에 꼭 교도소에 가서 미사를 보시나요.

▶추기경=그럼요, 교도소에 가면 거기(감옥) 사람들은 대부분 밖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봉두완=(하하하) 그런데, 어떻게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한다든가, 그런 건 많지 않은 것 같거든요. 과거의 우리 지도자에 비해서는요.

▶추기경=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니까 그 분에 대해 될수록 말을 아끼려고 합니다. 단지 한가지, 그 분은 당신 나름대로 기성 정치인은 썩었다, 이 사람들과는 개혁을 도저히 해나갈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은, 대부분 386 세대를 비롯한 젊은이인데, 자신이 하는 일에 찬성하고, 언론이나 기성 정치인은 자신을 비판하는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만 기울어지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쪽을 배척하고, 그러다가 편을 가르는 겁니다.

▶봉두완=일국의 지도자가 그러면 곤란하죠.

▶추기경=그렇습니다. 지도자는 포용력을 가져야 합니다. 대통령은 좀더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에게 귀를 기울이고, 모든 이를 감싸안아야 합니다. 편가르기는 말아야죠. 자신이 믿던 최측근도 현재 구속 수감되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까.

▶봉두완=그러게 말입니다.

▶추기경=국민마저 냉소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깨끗하다고 자신만만하더니 이게 뭐야, 이런 식으로 비판적으로 나오는 것이죠. 하여튼 현재는 남을 비판하기보다 나는 어떤가 반성하고, 과거를 털고,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봉두완=대통령께선 영세(세례)를 받은 분입니다. 다시 하느님 근처로 가서 지혜를 구하면 어떨까요.

▶추기경=전에도 제 스스로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어떤 자리에선 대통령을 위해 모두 기도하자고 제의도 했습니다. 대통령의 어깨에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까요. 지금도 큰 풍랑을 만난 배의 선장처럼 어려움에 처한 대통령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도록, 즉 하느님께서 대통령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봉두완=기도하는 마음으로 국정을 수행한다면 조금 달라지겠죠.

▶추기경=그렇게만 한다면 정말 달라질 겁니다.

▶봉두완=그런데 고집이 좀 센 것 같거든요.

▶추기경=글쎄, 얼른 보기엔 좋은 점도 있겠지만 현재처럼 간다면 앞날이 걱정스럽습니다.

▶봉두완=마음을 풀고 상생의 정치를 펴야겠죠. 그건 그렇고, 경제도 말이 아닙니다.

▶추기경=기업인도 경제를 위해 돈을 댔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선 경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고 모두 통감하고 있습니다. 경제인은 더 이상 정치인에게 끌려다녀선 안 됩니다. 기업가의 소임을 다하자, 바르게 정직하게 살자, 이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정치나 경제나 정직과 성실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봅니다. 그런 신뢰가 바탕이 돼야 국제적 도움도 얻을 수 있습니다.

▶봉두완=올해도 노사.지역 갈등이 여전할 것 같습니다. 무엇부터 풀어가야 할까요.

▶추기경=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병들거나 가난한 사람, 즉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에서 가장 강조한 이웃 사랑도 바로 그것입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인들은 돈이 최고다 하는 배금주의에 깊숙이 빠졌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외국인 6백여명을 상대로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대다수가 한국인은 돈과 권력만 아는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

▶봉두완=원인은 무엇입니까.

▶추기경=이웃의 소중함,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급증하는 자살을 보세요. 생명의 고귀함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 잡혀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란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트로츠뎀 야 줌 레벤 자겐(Trotzdem Ja zum Leben Sagen)"이라고 말했습니다. 직역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는 '예스'를 말한다"인데, 어떤 처지에서도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가야 할 날이 가까워지니까 생명의 존귀함을 더 절실하게 생각합니다.

▶봉두완=달리 갈 곳이 있으세요.(웃음)

▶추기경=누구든지 가야 하는 날이 있잖아요. 그래서인지 세상이 갈수록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직 인사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요즘엔 산에 가지 못하고 우리 집 뒷동산을 종종 산책하는데, 지난 늦가을 단풍에 반해 몇번이나 멈춰서곤 했어요. 파란 하늘과 붉은 단풍에 번갈아 취했습니다.

▶봉두완=정정하신데요, 뭘. 새해 건강하세요.

▶추기경=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 기자가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예전에 '열린 음악회'에서 '애모'를 부르셨죠. 최근 18번은 어떤 노래예요.""그 노래 다 잊어버렸어요. 요즘엔 '향수'를 좋아하는데 중간에 음이 높아 목소리가 안 나와요." 추기경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정리=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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