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우위 론에 일부 비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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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쌀 파동 수습에 나선 김 수석에게는 이 전말에 대해 달리 할 말이 있었을 법하다. 당시의 일을 잘 아는 한 인사는『전대통령은 그 즈음「장관뿐 아니라 해당 실무자도 책임지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그 첫 케이스로 B씨가 억울하게 당한 것 같다』며 김 수석도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5공경제의 이면을 본격적으로 파헤친 이장규씨(중앙경제신문 기자)의 저서『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는 80년 당시까지도 엉망이었던 농수산부의 양곡관련 통계를 청와대가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 수요예측의 혼선으로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억울한 첫 희생양>
김재익씨가 일하던 청와대는 대학연구실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들이 암투를 거듭하던 흉흉한 곳이었다. 김 수석이 학처럼 고고할 뿐 일에 있어서는 예스맨에 불과했다면 갖가지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겉만 솜같이 부드러웠지 안으로는 강철 이상으로 단단했다.
스스로 사심이 없었던 만큼 그는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조용하게, 그러나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정통관료나 군부출신이 아니었고, 대통령만이 유일한「빽」이었던 김 수석이었기에 출신에 따른 이런저런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히 개혁을 외칠 수 있었다. 금융자율화를 추진하던 김재익 수석이 장애물로 등장한 재무부를「점령」해 가는 과정을 백완기 교수(고려대)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재무부는 금융자율화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김재익 수석은 재무부의 아성을 깨뜨리기 위해 기회를 노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제기획원차관보였던 강경식이 승진해 재무부차관으로 들어앉는다. 기획원의 재무부 점령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어 기획원의 이진설 공정거래실장이 재무부 제2차관보로, 이형구 기획국장이 재무부이재국장으로 옮겨 앉는다. 반면에 정인용 재무부차관은 기획원차관으로, 하동선 재무부차관보는 기획원차관보로, 정영의 기획관리실장은 공정거래실의 상임위원으로 옮겨 앉는다. 그리고 재무부의 간판국장인 이수휴 이재국장은 국제금융 국 재무협력 관으로 좌천된다. 이 무렵(82년) 이·장 사건이 터지면서 나웅배 재무장관이 물러난다. 차관인 강경식이 차관 승진 6개월만에 다시 장관으로 올라앉는다.…강경식이 장관이 되면서 재무부는 기획원출신으로 더욱 다져진다. 기획원출신인 김흥기 전매청장을 재무부차관에 앉히고 이형구 이재국장을 금융담당차관보로 승진시키고 역시 기획원출신인 강신욱 사우디아라비아 재무관을 이재국장으로 앉힌다. 심지어 재무부의 금융정책과장까지 기획원 출신으로 바꾼다. 이로써 재무부는 6·28 금리인하조치와 금융실명제를 추진하게 된다.』
실로 엄청난「초토화작전」이었는데, 이 때문에 적도 많이 생겼지만 그가 개인적인 영달이나 청탁 때문에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정책방향에서라면 몰라도「인간 김재익」의 면모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편이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사생활 일관>
다시 김 수석에 대한 비판론을 들어보자. 그의 경제관에 대해 관료출신 C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그와 함께 경제현안에 대해 토론을 많이 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김 수석의 경제철학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데가 있었어요. 한 예로 그는「한국은 구태여 농업을 할 필요가 없다. 외국의 싼 농산물을 수입해 다가 쓰면 된다」고 주장하곤 했어요. 극단적인 비교우위론 이랄 까요. 스위스는 시계 같은 정밀공업만으로 잘 살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말 때문에 나는 유럽여행을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일부러 스위스의 산업들을 유심히 살핀 적이 있습니다. 김 수석의 주장과는 달리 스위스는 정밀공업 말고도 계단식 밭을 만들어 밀 증산에 힘쓰고, 우유자급을 목표로 축산에도 열심이었어요. 나는 김 수석에게 한국이 농업을 폐지하면 당장 농민들은 어디로 가느냐. 도시로 흘러들어 영세민 걸인이 돼서 결과적으로 사회안정을 흔들게 되지 않겠느냐」고 반론을 폈지요. 그랬더니 그는「그런 것은 경제가 알 바가 아니 야」하고 일축하더군요. 80년대 초 당시 우리나라는 연간 10억 달러 가량의 사료용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김 수석은 같은 논리로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그 돈으로 차라리 쇠고기를 50만t 사들이는 게 옳다. 사료를 들여와 소를 키우느니 차라리 쇠고기를 수입하면 비용이 3분의 1가량으로 줄어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축산농민들은 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국제수지 흑자 예고>
이론적으로야 얼마든지 공방이 계속 되겠지만 김 수석은 당장 눈에 보이는 뚜렷한 업적들을 너무 많이 남겼다. 우리나라의 통신혁명(전자식 전화기 도입) 은행의 지로제도 도입 등에도 김 수석의 기여 가 컸다.
부인 이순자 교수에 따르면 김 수석은 생전에『내 눈에는 분명히 보이는 젓을 왜 남들은 이해해 주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자주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80년대 초『몇 년 후면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는 남편의 주장을 주위에서 웃음거리로 삼길 래『너무 공허한 얘기를 하다가 당신의 신용만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충고했던 이 교수는 김 수석 사후인 86년 말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건국 후 최초로 국제수지 흑자」라는 톱기사가 실린 고국의 신문을 대하고 밤이 깊도록 울었다고 회고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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