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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권력과 언론은 싸우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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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12면

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다. 정부 측은 이번 방안이 제도 언론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실질적인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선진정책이라고 자랑이고, 언론 측은 국민의 알 권리를 훼손하는 언론탄압이라고 맞선다. 권력과 언론이 싸우는 형상은, 모든 싸움이 그렇듯, 당사자들의 절박한 이유에 관계없이 보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스펙터클이다. 이를 스크린이 놓칠 리 없다.
 
거짓과 불의에 저항하는 언론

스크린에 투영된 ‘권력과 언론’의 초상

탄생부터 일거수일투족이 생중계 되는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을 통해 매스미디어의 광기를 풍자한 39트루먼쇼39

미국 영화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오선 웰스 감독의 걸작 ‘시민 케인’(1941)이 언론재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주목을 받았을까? 언론인은 언제나 스크린의 관심을 받아왔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대통령의 음모’(알란 파큘라 감독, 1976)는 기자에 대한 영화적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악한 권력, 이에 맞서는 용기 있는 기자들. 마치 서부극의 주인공처럼 기자는 ‘악당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것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거짓말을 해대는 권력과 사실을 파헤치는 언론이라는 대립구도는 이후 스크린의 인기소재가 됐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강우석, 1991), ‘펠리칸 브리프’(알란 파큘라, 1993)도 이런 구도를 갖고 있고, 사실을 극화한 ‘킬링 필드’(롤랑 조페, 1984), ‘살바도르’(올리브 스톤, 1986) 등은 대립구도에 ‘진짜’ 이야기라는 현실감까지 더해 관람의 긴장도를 더욱 높였다. 백인 중심의 시선이 여전히 불편하긴 하지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기자의 활약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대립구도의 악당 역이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으로 바뀌며, 언론의 모습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냉전이 끝난 90년대부터 이런 변화된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 사건을 극화한 ‘인사이더’(마이클 만, 1999)는 CBS의 간판 뉴스프로그램인 ‘60분’의 PD(알 파치노)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내부고발자의 도움으로 PD는 돈을 벌기 위해 국민의 건강까지 착취한 다국적 담배회사의 악행을 밝혀내는 데 성공한다. 세계적인 특종인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상부에서 방송금지 명령이 내려온다. 대기업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할 경우 손해배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내부고발자는 가정파탄의 희생까지 감수했는데, 없던 일로 하자니 절망에 빠지고, PD에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언제부터 방송을 변호사들 마음대로 했느냐”며 명령에 저항하던 PD는 타사 언론인들의 연대에 힘입어 결국 방송을 내보내는 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료들의 배신은 물론이고, 과거와는 달라진 언론환경을 인식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PD가 방송국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종결된다. 어느덧 언론자유를 훼손하는 직접적인 억압자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경제권력으로 바뀐 것이다.
 
권력으로서의 언론, 권력을 위한 언론

언론이 아예 정부의 한 기관으로 등장하는 미래를 다룬 39브이 포 벤데타39

언론이 경제권력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70년대에 ‘네트워크’(시드니 루멧, 1976)에서 제시됐다. 이 영화에서 ‘사회정의’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면, 그 언론인은 순진한 어린애 취급을 당한다. 오로지 경영수지를 개선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청률을 올려야 한다. 취재현장을 누비던 정열적인 ‘언론인’은 스크린의 주역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대신 ‘언론’ 자체가 주역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언론의 역할은 악역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젠 언론 자체가 비판 대상의 권력이 된 것이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올리버 스톤, 1994)는 바로 권력이 된 언론에 총을 겨눈다.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사건이라면 살인자의 광란도 좋은 뉴스가 되는 매스미디어의 광기를 풍자한다. ‘트루먼 쇼’(피터 위어, 1998)에선 매스미디어가 감히 사람의 인생도 결정한다. TV는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생방송하며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인공 세트에 살며, 자신의 사생활이 생방송되는지 전혀 모른다. 이쯤 되면 미디어는 창조주에 가깝고, 세상은 오직 미디어를 위해 조직되는 것이다.
더욱 비관적인 시각은 권력화된 언론이 비판기능을 포기하고, 다른 권력과 사이좋게 공생하는 모습이다. ‘왝더독’(배리 레빈슨, 1997)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음모전을 다룬다. 성추행 사건을 일으킨 대통령은 선거에서 떨어질 판이다. 참모들은 정치꾼(로버트 드 니로)을 고용한다. 그는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뉴스를 만들어낸다. 전쟁을 이용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영웅을 창조하는 사이 국민들은 추행사건을 잊어버린다. 비판기능을 잃은 언론은 가짜로 만들어진 뉴스를 말 그대로 ‘전달’만 하며 권력의 조종에 충실히 복무한다. 덕택에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고, 언론과 권력이 사이좋게 지내는 사이, 국가는 썩기 시작하는 것이다.
‘매트릭스’로 유명한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한 ‘브이 포 벤데타’(제임스 맥테이그, 2006)는 더욱 비관적이다. 미래를 다룬 SF영화인데, 여기서의 언론은 정부의 한 기관이나 다름없다. 정부의 공지사항을 잘 전달하면 된다. 지금의 국정홍보처 같은 기관이 언론으로 둔갑해 있는 것이다. 독재자는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고, 이렇게 비판기능을 무력화시킨 정치권력은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존재로 나온다. 역설적으로 보자면, 비판 언론이 없는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지, 이 영화는 묵시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권력을 감시하던 언론인의 모습은 스크린에서 점점 줄어들고, 대신 권력이 돼버린 언론, 또는 권력에 기생하는 언론의 모습은 점점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국민은 시한폭탄을 등에 깔고 누워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는데, 권력과 언론은 모두 고개를 돌린 ‘노 맨스 랜드’ (다니스 타노비치, 2001)의 상황에 다름 아니다. 아쉽게도 최근 들어 스크린은 권력과 언론 모두에 실망과 의혹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언론’의 싸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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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씨는 미술과 몸을 섞은 영화 이야기『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로 이름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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