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지식인 허위의식 용서없이 고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브레이크 없는 문화

테어도르 데일림플 지음
채계병 옮김,
이카루스미디어
456쪽, 1만5200원

가차없다. 엘리트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을 저자는 용서 없이 고발하고 파헤친다. 페미니스트, 카를 마르크스, 피델 카스트로, 북한의 독재자부터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축 가공한 끔찍한 물체를 ‘작품’이라며 버젓이 전시하는 ‘전위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메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에세이집이지만 한국에서 유행하는 ‘몽롱한 언어를 조종하는’ 수필집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대로 책상에 자리잡고 앉아 생각하며 읽어야 할 듯.
 
저자는 공산주의자였던 부친(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아들에게 아프리카를 정복한 제국주의자의 전기를 읽으라고 권하기도 했다)과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신과 의사로서 북한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에서 일했고, 2005년 은퇴하기 전에는 영국의 빈민가 병원과 교도소에서 일했다. 이런 지식과 경험의 결정체가 25편의 에세이로 응축됐다.

전통과 금기를 무조건 깨는 것이 미덕인 양 여기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그는 경멸한다. 북한에서는 평양에 외국인 대표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퍼레이드에 동원된 수십만 명의 군중의 얼굴 하나하나에서 ‘극도의 피로와 항구적인 테러로 창백해진’ 표정을 읽어낸다(‘사회를 읽는 법’).
 
내전 중이던 라이베리아의 한 공공건물에서 그는 파괴된 피아노 위에 폭도들이 싸놓은 대변을 목격한다. 동행한 영국인 저널리스트들이 그 광경을 야만이 아닌 ‘오랜 엘리트 지배에 대한 반감’ 탓으로 해석하자 저자는 경악한다. 문화와 문명에 대한 서구 인텔리겐차들의 허위의식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우린 생각보다 잃을 것이 많다’).
 
마르크스, 그리고 그와 같은 해 태어나 같은 해에 죽은 투르게네프를 비교하면서 “투르게네프가 인간을 본 곳에서 마르크스는 계급을 보았다”고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공산주의에 의한 대학살은 이미 ‘공산당 선언’에 내재돼 있었다(‘인류를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 번역서 제목이 좀 생뚱맞긴 하지만 묵직한 책이다.

노재현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