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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카드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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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억원 가까운 카드빚에 짓눌려 아침 눈뜨기가 겁났던 40대 사업가 나부채씨. 한계에 달한 카드 돌려막기로 공포와 무력감에 시달린 2003년이었다. 최근엔 카드사에서 '연체발생 통지서'가 날아오더니 드디어 채권담당 직원의 독촉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사방이 가로막힌 암흑상황에서 자살생각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그런 나부채씨가 지난 일요일 희망체험을 했다. 오전에 아들과 함께 관람한 영화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과 오후에 서점에 들러 우연히 발견한 책 '빚 탈출, 행복찾기-인간을 미치게 하는 빚의 늪에서 빠져나온 8인의 탈출기'(최정웅.보성출판사)가 그의 기분을 바꿔놓았다. 부채씨가 보기에 반지의 제왕은 중세적 환상과 장엄한 애니메이션 전쟁이 압권인 어린이용 영화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이어서 소유하고 싶지만, 소유하는 순간 그 강렬한 힘에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는 절대권력이 주제인 고전영화였다. 천애협곡 높은 산봉우리에 붉은 빛을 뿜으며 걸려있는 외눈으로 형상화된 절대권력은 현실의 나부채씨에겐 돈으로 해석됐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절대권력에 도달해 권력의 소유를 상징하는 절대반지를 버렸다. 절대반지를 버림으로써 절대권력은 붕괴했다. 그리곤 단순소박한 평화의 세계가 찾아왔다.

육식공룡과 비슷하게 생긴 절대권력의 괴물들이 몰려 왔지만 인간영웅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그 장면에서 나부채씨는 빚문제만 나오면 갑자기 먹먹해지고 죄인처럼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나에게 필요한 건 빚에 맞서 싸우는 용기야'라는 내면의 소리가 울렸다.

'빚 탈출…'란 책은 용기를 찾은 나부채씨에게 '싸움 기술'을 가르쳐준 전투교범이었다. 제1 전투원칙은 '부채우울증에서 벗어나라. 기분을 새롭게 바꾸라'다. 저자는 카드빚이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이 아니라 길들일 수 있는 상대적인 상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부채씨는 책에 나와 있는 여러 대안 중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하기로 했다. 나부채씨는 '2004년은 올해와 좀 다를 것 같다'는 기대감에 설레고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