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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칼럼] 민주주의 후퇴 부를 '진보정치 위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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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27면

올해의 선거전이 보여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현상은 진보정치의 위기다. 보수정당의 두 후보들이 30~20%대의 지지율을 보이는 반면, 진보진영의 후보들은 고작 5% 안팎의 지지를 얻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모든 대선에서 선거를 불과 6개월 앞두고 이처럼 일방적인 지지의 쏠림이 있었던 적은 없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어느 지식인의 표현처럼 건강한 민주주의는 보수와 진보의 팽팽한 경쟁 위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우리의 진보정치는 분명 위기에 빠져 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 전반의 체질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진보정치 위기의 첫 번째 증상은 ‘인식의 위기’다. 시민들이 보내는 신호는 분명하건만 진보세력의 눈과 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지지율이나 진보진영 후보들의 지지율은 1년 가까이 처참한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진보정치 세력은 여전히 선거 막바지의 화려한 역전극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시민들은 이번 선거의 핵심이슈로 ‘일하는 능력’이라는 실용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지만, 진보정치는 여전히 평화ㆍ개혁ㆍ민주라는 추상적인 구호에 매달려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진보정치의 보수화’를 목격하고 있다. 시민들의 기준은 참여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능력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지만, 진보세력은 변화를 거부한 채 기존의 진보적 의제와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기성질서의 옹호 내지는 완만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보수라고 한다면, 오늘날 한국의 진보세력은 지난 10년 진보의 시대에 묶여 있는 보수화된 정치세력이다.

위기의 두 번째 증상은 ‘대응능력의 위기’다. 진보세력이 정치를 주도한 지난 10년 사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이른바 세계화의 본격화다. 세계 10위의 무역대국인 우리 사회는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ㆍ정치적 측면에서 세계의 흐름에 깊숙이 참여하게 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유무역협정(FTA), 국제기후협약과 같은 세계 표준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촘촘히 엮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보수와 진보는 세계와 긴밀하게 연계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세계화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아울러 갖게 마련인데, 이에 대한 진보정치의 대응은 지리멸렬하거나 혹은 답답한 것이다. 한ㆍ미 FTA를 21세기의 새로운 식민지로 규정하는 진보정치 세력을 보면서 다수의 시민들은 절망적인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양극화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안으로 꼽히는 사회투자국가론 등이 고작 영국 노동당의 신노동당 플랜(New Labour Plan)의 복사본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서 다수의 지식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세 번째 증상은 ‘도덕주의가 불러온 위기’다. 지난 10년간 정부 권력을 운영하면서 진보정치는 분명 정치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민주화 운동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도덕의 관점에서 스스로와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에 매달려 있다. 예컨대 진보정부가 추진하는 진보적 의제들이 현실정치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결과 앞에서 진보 지식인들은 당황한 채 현실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진보정치가 여전히 자신들이 하는 일은 늘 옳은 것이라는 1980년대식 도덕주의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근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수구 보수적’ 한나라당의 집권은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주장하는 진보 지식인들에게서 우리는 낡은 도덕주의의 절정을 목격하게 된다.

진보 10년은 분명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와 바람을 불러왔다. 하지만 정작 새 바람의 원동력이었던 진보정치는 오늘날 화려한 과거의 추억에 기대어 사는 보수가 되어 가고 있다. 이는 변화를 핵심으로 하는 진보의 위기다. 이 같은 진보의 위기는 상이한 이념들이 경쟁하고 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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