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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 결성 52년 만에 ‘침몰’ 위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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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08면

지난 3월 3일 도쿄 한복판의 히비야 공원에서 조총련 소속 교포 5000여 명이 일본 당국의 조총련 산하단체에 대한 압수수색과 강제수사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단 플래카드의 그림에 있는 글씨는 ‘만경봉 92호의 입항을 인정하라’(왼쪽)와 ‘인권침해, 불법 강제수사 반대’. 사진제공=권철(프리랜서)

도쿄의 교통요지 가운데 하나인 이다바시(飯田橋)역 부근에 지상 10층 건물이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담장은 보통 건물보다 훨씬 높고, 철제 정문은 굳게 닫혀 있다. 건물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가 행인들의 동태를 좇는다. 1986년 준공 이래 조총련의 심장부로 기능해 왔고 언젠가는 주일 북한 대사관으로 격상될 것이라고 자부해온 조총련 중앙본부 건물이다. 하지만 조총련은 조만간 이곳을 떠나야 할 처지다.

빚·조직이탈·日압박 ‘삼각파도’ 몰아친다

18일 도쿄 지법은 조총련에 627억 엔의 채무 변제를 명령하고 중앙본부 토지와 건물에 대해 가집행이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채권자는 정리회수기구. 공적자금이 투입된 파산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인수해 처리하는 기구다. 법원 명령으로 중앙본부 부동산은 경매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조총련은 새 둥지를 찾아 떠나야 할 상황이나 그 또한 마땅치 않다. 도쿄 본부 등 산하 기구의 건물 역시 같은 이유로 이미 넘어갔거나 넘어갈 처지에 있다. 다른 건물에 입주하려 해도 조총련을 세입자로 받아들일 건물주가 선뜻 나설 것 같지도 않다.

조총련이 채무에 몰린 것은 조긴(朝銀) 신용조합의 파탄 때문이다. 조긴은 일본 은행들에서 융자를 받기가 까다로웠던 재일동포 상공인들이 출자해 만든 자조(自助)적 금융기관이지만 그 운영에는 조총련이 깊숙이 개입해 왔다. 자금을 융자해주는 대신 일부를 리베이트 형식으로 기부 받아 조총련 자금으로 돌렸다. 그중 적지 않은 액수가 북한으로 불법 송금됐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판단이다.

위기는 또 다른 위기를 불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명성의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의 창 끝을 허종만 책임부의장(사진)에게 겨누고 있다. 조총련은 중앙본부가 경매로 넘어가는 상황을 면하기 위해 기발한 착상의 편법을 동원했다. 조총련의 존립에 우호적이었던 오가타 시게다케(緖方重威ㆍ73ㆍ사진) 변호사(전 공안조사청 장관)의 협력을 구해 그가 대표로 등재된 유령회사와 매매 계약을 하고 지난달 31일자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친 것이다. 빚쟁이가 판결문을 들고 집을 내놓으라고 몰려오기 전에 은밀히 다른 사람 앞으로 명의를 넘기는 수법이었다. 대신 오가타로부터는 5년간 건물 사용권을 인정받고, 자금이 생기면 되사들인다는 조건에 합의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 같은 사실이 보도를 통해 알려진 12일 오가타와 조총련 측 대리인인 쓰치야 고켄(土屋公獻ㆍ사진) 전 일본변호사연맹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와 압수수색을 벌였다. 돈이 건네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소유권 이전 등기는 18일의 판결 이후 예상되는 압류ㆍ경매 등 강제 집행을 면하기 위한 위법행위란 것이다. 특히 검찰 간부를 거쳐 조총련의 위법 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의 공안조사청 장관을 지냈던 오가타가 조총련과 담합성 매매계약을 한 데 대해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수사의 다음 수순은 허종만 부의장이다. 그가 이 모든 과정을 지휘했다는 것이 오가타와 쓰치야 변호사의 증언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일본 검찰은 강제 연행이 아닌 임의 출석 형식으로 조사한다는 방침이지만 처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허 부의장은 사실상 조총련을 지배하고 모든 결정권과 인사권을 행사하는 실력자다. 조총련과 북한의 권력 실세를 연결하는 파이프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측근을 비롯, 일본 역대 정권과 깊숙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조총련은 이번 판결 전에도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 왔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두드러진 일본 사법 당국의 전방위적 수사와 압박 때문이다. 조총련 하부 기관이나 김만유 병원 등 조총련 관련 건물에 대한 빈번한 압수수색은 대표적 예다. 지난해 11월에는 조총련계 여성이 매매 허가 없이 링거액을 구입한 혐의(약사법 위반)와 관련, 경시청이 조총련 하부 단체가 대거 입주한 조총련 출판회관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조총련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아베 정권이 조총련 와해 또는 강제 해산을 목표로 삼고 있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아베 총리가 조총련 전체를 범죄집단시하고 있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 내 여론이 동정적이지 않다. 여론이 결정적으로 악화한 계기는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본인에 대한 과거 납치 행위를 시인한 것이 걷잡을 수 없는 반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여파가 조총련에 미쳤다. 조총련이 당시 납치 행위에 가담했을 것이란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되면서 ‘조총련=북한의 하수인’이란 이미지가 고착됐다.

이로 인해 조총련에 적(籍)을 두거나 우호적이던 재일동포들의 이탈 현상이 가속화됐다. 그때까지 유지하고 있던 ‘조선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일본에서 미수교 국가인 북한 국적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1945년 이전 한반도 출신자와 그 자손에 대해서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한 ‘조선반도 출신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일본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조총련 설립 초기에는 재일 동포 60만 명 중 50만 명이 조총련계였으나 지금은 4만 명 남짓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조총련의 근본적인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총련 활동가뿐 아니라 일반 동포들까지 이탈하는 현상은 조총련의 존립 근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조총련에 대한 일본의 압박이 북ㆍ일 관계는 물론 6자회담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지난 3월 베트남에서 열린 6자회담 실무그룹 회의를 공전시키면서 ‘조총련에 대한 탄압 중지’를 주장했다. 이래저래 조총련 문제가 몰고 올 파장이 간단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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