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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인간 욕망 부추겨 진화하는 '영리한 식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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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고? 천만에.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거기다 거대 농장을 만든다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건 아니라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자연과학 저술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지은이에 따르면 이는 밀과 옥수수 같은 작물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데 인간을 이용한 사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벌이 꽃을 찾아 들며 꿀을 얻고 꽃가루를 옮겨 식물의 수정이 가능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물 입장에선 꿀로 벌을 유혹해 꽃가루 나르기를 시킨 게 아닌지.

이렇게 보면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인지를 따지는 게 무의미해진다. 식물학에선 이를 공진화(共進化)라 한다. 서로 다른 종의 생물이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진화하는 것을 말한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사과ㆍ대마초ㆍ튤립 등을 소재로 영리한 식물이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어떻게 공진화를 이뤄왔는지를 광범위하게 살펴본다.

지은이에 따르면 흔히 먹는 사과에도 공진화의 문화사와 자연사가 담겨있다. 사과는 원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산악지대에서 자라던 야생식물이었으나 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흘러 들어 갔다. 거기에서 접붙이기 기술에 힘입어 맛있는 과일로 자리 잡았고, 서양에 진출했다. 유럽에선 포도를 가톨릭 교회의 타락과 연결 지었던 청교도들이 사과를 건강한 과일로 치면서 재배영역을 더욱 넓혔다. 미국인은 지상에서 에덴동산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에서 사과나무 심기에 열중했다. 하지만, 재배 확대의 진짜 이유는 그 달콤함에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사과의 입장에서 보면 달콤함으로 인류를 유혹해 세계 곳곳에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 인류는 사과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한때 수천 종이 재배되던 사과는 현대에 들어와 단맛을 내는 인스턴트 식품과 경쟁하게 되면서 당도가 높은 몇몇 종만 남고 나머지는 과수원에서 자취를 감췄다. 인위적 선택으로 사과의 종 다양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기친 것이다. 이렇듯 식물의 유전자에는 인간의 문화사가 기록돼 있다. 지금 존재하는 식물 종은 인간과의 오랜 관계가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과가 단맛이라면 꽃은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특히 변종을 만들기가 쉬운 튤립은 인간의 마음에 꼭 들게 진화해왔다. 그래서 17세기 네덜란드에선 알뿌리 하나가 대저택 가격에 팔리는 투기 열풍이 불었다. 18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에선 술탄 아흐멧 3세가 네덜란드에서 수백만 개의 알뿌리를 수입하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흔들렸다. 그는 결국 반란으로 제위를 잃었다. 이쯤 되면 튤립이 인간을 길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인간의 잘못된 욕망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19세기 아일랜드에선 돈이 되는 감자 한 종만 재배하는 바람에 1846년과 47년 흉년이 들자 다른 대안이 없어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반면 생존을 위해 감자를 기르던 남미에는 다양한 종을 동시에 길러 흉년이 들더라도 대기근이 날 일은 없었다. 이젠 유전자 변형으로 더 큰 욕망을 이루려는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식물이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이용해왔는지에 대한 역사서다. 식물의 눈으로 인간과 그 욕망을 바라본 것이기도 하고.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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