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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비자가 만든 '백화점형 할인점'과 '중가 항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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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국내 최초의 저가 항공사인 한성항공은, 2005년 출범 초기 기내에서 음료수를 무료로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잔당 1천 원씩을 받고 팔았다. 가능한 원가를 낮추기 위해 공짜 서비스를 제한하는 다른 나라 저가 항공사들의 선례를 따랐다. 세계적인 저가 항공사들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저가 항공사들은 기내에서 비스켓류를 팔지 않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청소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성항공의 음료 판매 방침에 대해 우리 소비자들은 처음부터 강하게 반발했다. ‘음료수가 얼마나 한다고 야박하게 돈을 받느냐’는 불만이었다. 한성항공은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이 회사는 음료 서비스를 무료로 전환했다. 이 항공사의 지정 좌석제도 다른 나라의 저가 항공사와는 다른 방침이다. 세계적인 저가 항공사들은 고객이 인터넷을 통해 직접 예약하고 표를 출력한다. 기내에서는 선착순으로 원하는 좌석에 앉는다. 당연히 이착륙이 빨라지고 운항 횟수가 늘어난다. 여기서만 원가의 10% 이상을 절감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선착순 좌석제로 인해 고객 분쟁이 늘 가능성이 커 지정 좌석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밖에도 기내에서 고객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주고,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는 등 이 항공사의 서비스는 기존 항공사에 못지않다.

이런 서비스에 대해 소비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도 만만치 않다. 가격이 비싸진다는 것이다. 현재 취항중인 한성항공과 제주항공의 항공료는 기존 항공사의 70%선. 이 정도 가격이라면 명실상부한 저가 항공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는‘중가 항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항공업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영국의 대표적 저가 항공사인 톰슨플라이는 영국~유럽 구간 요금을 4만 원대로 책정하고 있다. 한국형 마케팅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동국대 여준상 교수(경영학과)는 “우리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서비스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 영미권과 달리 서비스라는 단어가 ‘공짜’와 동의어로 쓰이는 현실은 이런 경향을 잘 반영한 결과다.

할인점 업계에서는 세계적인 창고형 할인점들이 국내에서 철수한 것도, 우리 소비자들의 서비스 기대 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가격 파괴에만 초점을 맞췄던 월마트와 까르푸는 할인점 내의 진열과 구색, 그리고 안내 직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이마트와 홈플러스, 홈에버 등 국내 할인점들은 백화점 못지않은 서비스를 제공했다. 한 마디로 백화점형 할인점을 지향했다.

창고형 할인점은 한국형 할인점, 즉 백화점형 할인점을 당해낼 수 없었다. 영업에 실패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해외 할인점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국내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특성을 지적했다. 싼 가격에 좋은 서비스까지 원하는 고객들은, 외국계 할인점에 대해‘싼 물건 찾는다고 사람 무시하느냐’는 불만을 가졌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국형 할인점은 어떻게 해서 백화점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가격을 낮출 수 있었을까?

여 교수는 이마트(신세계백화점)나 홈플러스(삼성), 그리고 홈에버(이랜드)가 모두 브랜드 파워를 가진 모기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성공 비결로 꼽는다. 이들은 계열사를 이용해 주요 제품의 원가를 낮출 수 있었고, 여타 제조업체에 대해서도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우리나라 소비자의 특성과 관련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높은 가격을 더욱 선호한다는 점이다. 많은 수입업체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비싼 우리나라의 수입가에 대해서 단골 메뉴로 들이대는 변명거리이기도 하다. 수입차는 세계적 수준에 비해 국내 시판 가격이 차종에 따라 적게는 1000만원에서 많게는 5000만 원까지 비싸다. 핸드백이나 휴대폰 등 사회적인 노출을 통해 자기 만족을 얻는 품목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 소비자의 고가 선호 성향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한정판(Korea Limited Edition).세계적인 브랜드가 우리 시장만을 겨냥해 만든 제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위스키 시장에서는 병당 1200만 원이나 했던 로얄 살루트 50년산(750㎖)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발렌타인 21년산(500㎖)이나 랜슬럿도 국내 시장을 겨냥해 제작된 위스키들이다. 세계적인 화장품 브랜드들로 잇따라 국내 시장용 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우리 소비자의 이런 특성을 두고는 비판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이 엇갈린다. 소비자들의 왜곡된 욕구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우리 시장을 ‘허영의 시장’이라고 보는가 하면, 우리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우리 시장이 세계적인 기업의 시험 무대가 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어떤 입장에 서든 우리 소비자들의 독특한 취향은 한국형 업태와 제품을 연달아 낳고 있다. 중가 항공과 백화점형 할인점, 한국 한정판을 뒤이을 업태와 제품은 과연 무엇일까?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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