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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컬러 유행으로 포마드 "불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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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화장품제조기술이 발달한 탓인지 『미인은 만들어지는 것이다』『여자는 아침에 얼굴을 보고 판단하라』는 말이 갈수록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실제로 「만들어진 미인」이 거리를 누비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띄고 아름다워지고픈 여성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화장품회사마다 자외선차단이다, 세포 노화방지다 하며 신기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화장품의 역사는 7천년전 고대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향료를 섞은 기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4천년 전부터 연지·분·머리기름 등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곰과 호랑이가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었다는 단군신화는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햇볕이 안드는 곳에서 미백효과가 있는 쑥과 마늘을 먹고 바르던 당시 사람들의 화장풍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서양처럼 각종 화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조선후기까지 주로 백토·꿀·각종 식물성기름이나 꽃잎·수세미수액 등 천연재료를 이용해 화장수·연지·분 등을 만드는 수준이었다.
근대적 형태의 화장품은 1910년 당시 포목상을 크게 벌였던 박승직씨(두산그룹 창업주)의 부인이 활석가루에 납을 끓인 거품을 섞어 만드는 가계의 비법을 상품화시킨 것이 최초다.
「박가분」이라는 상표로 20년 조선총독부의 화장품제조등록1호를 기록한 이 제품은 한달에 1만갑 이상 파는 대호황을 누리다 37년 납성분의 부작용 때문에 생산을 중단했다.
이후 「구리무」라고 불리는 일인상인들의 크림제품이 판을 치면서 국내화장품산업은 일인수중에 들어갔고, 일부 남아있던 국내상인들도 태평양전쟁 탓에 글리세린 등 각종 원료를 일제로부터 공급받는 처지여서 생산량이 미미했다.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국내 화장품회사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 가운데 럭키·태평양 등은 화장품으로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럭키는 구인회 창업주가 부산 자신의 집 마당에 락희공업사를 차려 「럭키크림」을 생산했는데 납품 받던 크림통이 너무 잘 깨져 자신이 직접 플래스틱통을 만들다 아예 화학제품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남성들 사이에서 「하이칼러」「올백」머리가 유행한 탓에 머리도 제대로 감지 않으면서 머리기름만 마구 바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태평양화학이 내놓은 「ABC포마드」와 「ABC비듬약」은 동시에 큰 히트를 쳤다. 50년대 후반 들어 국내산업이 안정되면서 화장품도 외국과의 제휴로 제조기술이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태평양화학은 당시최고 인기배우였던 이민자씨를 모델로 채용, 오늘날 화장품회사가 인기배우를 모델로 채용하는 효시가 됐다. 60년대 들어서는 성미쥬리아(현쥬리아)가 가정 판매원제도를 처음으로 도입, 큰 성과를 거두자 태평양 등 나머지 회사들도 65년부터 잇따라 이를 채택했다.
요즘은 개인의 사생활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는 풍조 때문에 대부분 직판 체제로 돌아서 외판원수가 2천여명에 불과하지만 85년만 해도 6개 업체에서 4만7천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들은 어느 집의 밥숟가락 수까지 알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여서 선거철이면 각 정당이 식사대접을 했을 정도였다.
70년대 들어선 태평양·쥬단학·쥬리아의 트로이카체제가 유지되다 80년부터는 신생회사의 잇따른 참여로 경쟁이 치열, 외국상품에 대한 경쟁력을 갖추는 발판이 됐다.<정철근 기자>
◇한국화장품산업 연표
1916년 박승직 박가분 개발
1945년 태평양화학(서성환)창립
1947년 럭키화학(구인회)화장품업 진출
1962년 한국화장품(임광정), 피어리스(한진경)창설 성미쥬리아 방문판매제 도입
1975년 대우 피어리스 인수, 진로 성미쥬리아 인수
1981년 나미, 최초로 FDA승인 럭키 화장품업계 재진출
1986년 외제화장품 완전수입자유화
1990년 수입화장품 국내 직접판매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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