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8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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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생명이란 좋은 것인가 보다. 말괄량이 밀키가 새로 집으로 들어온 후, 초가을 우리를 덮쳤던 두 번의 죽음은 어느덧 사라진 듯이 보였다. 나 역시 두 고양이 녀석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엄마와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우리는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조심스러움, 서로에 대한 호기심, 서로에 대한 기대들이 어느 정도 충족되거나 그렇게 될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자마자, 비로소 생활이라는 것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내 방에서 두 고양이 녀석들과 놀고 있는데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의 얼굴은 어두웠다. 엄마는 내가 벗어던진 양말과 잠옷을 집어들더니 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이렇게 아무 데나 팽개치면 어떻게 하니? 여자애 방이 이게 뭐니?"

방에 들어와 내게 바로 용건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에둘러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공부를 잘하라는 이야기로 끝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말을 꺼냈다.

"공부는… 안 하니?"

"할 거야."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쪼유네 엄마는 이런 말을 삼십 분쯤 한 다음에 공부 이야기를 꺼낸다는데 우리 엄마는 성질이 급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쪼유에 따르면 그녀의 엄마는 한 시간이 넘도록 방을 치우라는 잔소리만 하다가 결국 본론인 공부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방에서 나간 일도 있다고 했다.

"너… 엄마가 보니까 만날 고양이들하고 놀고 있던데 언제 공부를 해?"

"학교에서도 많이 하잖아."

엄마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엄마가 네게 고양이를 키우게 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줘. 이제 곧 고3이잖아."

"알아! 누가 그걸 몰라?"

이상한 일이다. 고3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신경이 곤두섰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엄마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는 더 이상 말싸움을 하기가 싫어서 책상으로 가서 엄마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네 성적…. 서울에 있는 대학은 갈 수… 있는 거니?"

엄마는 싸우지 않기로 작정한 듯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성적은… 나빴다. 그래,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안 좋은 성적을 안 좋다고 지적받을 땐 화가 났다. 나는 별로 공부를 잘한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아빠는 내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대신 아빠는 내게 많은 책을 사주었고, 나는 아빠 서재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다. 그런데 교과서만 잡으면 참고서만 잡으면 잠이 쏟아졌다.

"공부 못해도 된다며? 엄마가 그랬잖아…. 괜찮다고 했잖아. 행복하면 된다고? 나 지금 고양이들하고 행복해. 그럼 된 거잖아."

"엄마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 거 알면서 그래. 노력은 해야지. 노력하지 않으면 네가 너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가 없어. 너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될 거라구. 엄마는 그게 싫어."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비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려워…. 그런 말은 엄마 책에나 써."

엄마가 입술을 앙다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등 뒤로도 느껴졌다.

"기지배 말하는 본새하고는…. 어디서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

"그럼 무슨 말을 해! 한다니까 공부, 한다니까."

나는 거칠게 책들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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