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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지난해 노벨 문학상 받은 오르한 파무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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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스탄불=손민호 기자

한국 시간 13일. 지난해 '내 이름은 빨강'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55)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터키 시간 15일 오후 한국 언론과 인터뷰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잠깐 터키에 들렀는데, 짬을 내 한국 언론을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비행기에 올라탔다.

터키 시간 15일 오후 2시 이스탄불 시내의 파무크 집필실 앞. 경찰 3명과 사설 경비원 3명이 6층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다. 경비원은 일일이 신원을 확인했다. 통역은 파무크가 터키에 들어와 있는 것도 비밀이라고 일러줬다. 한국 언론과 터키 경찰 모두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4층 문이 열리자 노벨상 작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파무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대신 인터뷰 시간을 충분히 드리겠다."(※표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임)

-노벨상을 받고 인터뷰 신청이 쇄도했을 텐데.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의 1%쯤 만났을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선 기자 수천 명이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인터뷰 요청에 답조차 못해 준 경우도 수두룩하다. 내 책은 현재 51개 언어로 번역돼 있다."

-집필실 주변 분위기가 살벌하다.

"올초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보도한 '흐란트 기독교 신문' 기자가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10대 아랍 원리주의자가 기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 그 뒤로 경찰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터키 정부는 법률에 따라 사상의 자유로부터 위협받는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나를 지키는 건 어떠한 경우에도 내 이야기를 하라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노벨상을 받고난 뒤 생활은.

"지난해 10월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될 때 난 미국 컬럼비아대 교환교수로 있었다. 12월 터키에 귀국했다 위협을 느끼고 2월 초 다시 미국으로 갔다. 주로 유럽에 머물고, 일이 있을 때 터키에 들른다. 정치적 억압을 상당히 받고 있고 실제로 죽음의 위협도 느낀다."

-당신은 여느 노벨상 수상 작가와 다른 부분이 있다. 테러 위협을 받고 있으며, 문학적으로도 당신은 예외적인 경우다. 최근의 다른 노벨상 수상작은 별 화제가 되지 못했지만 당신의 작품은 지금 전 세계에서 일종의 특수 현상마저 보인다. 한국에서도 '내 이름은 빨강'은 노벨상 발표 직후 10만 부가 팔려나갔다.

"스위스.이탈리아.라틴아메리카 기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 노벨상을 받고서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라고 하더라. 터키에서도 내 책만 팔린다는 얘길 들었다. 그건, 남자들이 왜 미인을 좋아하는가와 비슷한 질문 아닐까. 언론에서 작품에 대해 많이 얘기하면 책이 많이 팔리더라(웃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내 소설은 '눈'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내 이름은 빨강'이라고 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국에도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가 있다. 혹시 누군지 아는가.

"여기까지 와서 한국문학을 질문하는가(웃음). 나는 한국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안다. 2년 전 서울에서 만났고 내가 그림도 그려줬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는 알지 못한다."

-최근에 당신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은 소설에서 서구의 영화가 터키인의 정체성을 흔들거나 좀먹는 것으로 묘사한 바 있다.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터키든 한국이든 서구 문화는 주로 영화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터키인들이 영화를 보면서 서구를 모방하고 있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서구 영화 때문에 우리 문화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나는 유럽 문명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나는 소설가다. 서구 영화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나는 극장에 가서 재미있게 영화를 본다."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 '밀양'은 한국의 소설가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아, 그런가. 스토리가 정말 좋았다. 작은 도시에 사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당신의 소설엔 색깔 이미지가 유독 강하다. 한국엔 소위 '색깔 3부작('내 이름은 빨강''하얀 성''검은 책')'이란 말도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슬람의 예술엔 색깔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이슬람 전통의 색깔을 상징으로 쓴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세상을 하나의 색깔로 바라본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을 극장으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설명하듯이 쓴다."

(※파무크는 '컬러 심볼리즘(Color Symbolism)'이란 표현을 썼다. 파무크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듯이 소설을 쓴다고 답한 것이다. )

-조만간 한국에서 당신의 소설 '검은 책'이 출간된다. 직접 소개한다면.

"'검은 책'은 내가 살았던 이스탄불을 설명하는 소설이다. 85년 뉴욕에 있었을 때 나는 터키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그땐 난 내 문학이 유럽의 문학을 모방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문화가 무엇이고 터키의 문화가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난 그때까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난 이슬람의 신비스러운 작품들을 읽었다. '검은 책'은 고전적인 이슬람 이야기를 포스트모던한 방식을 도입해 쓴 것이다. '검은 책'은 내가 이스탄불을 얼마나 사랑하고, 이스탄불에 얼마나 묶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검은 책'의 이스탄불은 '율리시즈'에서 묘사되는 더블린과 같다. '율리시즈'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더블린 아닌가."

(※'검은 책'은 파무크가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 한국 독자에겐 다소 어려울 듯싶다. 터키 문화에 대한 풍부한 지식 없이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소설은 이스탄불의 풍경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칠 것도 못 된다. 이 대목이야말로 파무크 문학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해 파무크를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스탄불의 우울한 영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화 간 충돌과 복잡함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을 섞어 가며 성심껏 답변을 하던 작가가 자꾸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다음 일정을 물었더니 이미 약속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래도 질문이 더 있으면 기꺼이 답하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겨우 물었다. "당신에게 소설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소설은 매우 진지한 문제다. 소설은 인생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단순한 이야기에 그쳐선 안 된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도덕은 무엇인가 등등…. 소설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순간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것들, 그 느끼는 즐거움을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손민호 기자

첩보원 접촉하듯 힘들게 만난 파무크

오르한 파무크를 만나는 일은 첩보물을 방불케 할 만큼 긴박하게 진행됐다. 파무크를 만나는 건, 단순히 해외 유명 작가를 인터뷰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유명세 때문만이 아니었다. 파무크는 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안겨준 모국 터키로부터 역설적이게도 테러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연이 있다. 노벨상 수상 직전 파무크는 터키인이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을 학살했던 역사를 비난하는 칼럼을 발표했다. 이 칼럼에 아랍 원리주의자들이 강력히 반발했고, 파무크는 이 때문에 법정에 서기도 했다. 모국 터키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냉대했다. 파무크에게 금의환향은 없었다. 이렇게 긴박한 가운데 파무크는 왜 한국 언론만 불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파무크는 한국을 편애한다. 이태 전 서울문학포럼에 참석차 방한했던 파무크는 이모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기억을 자랑스레 말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한국은 파무크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파무크 문학을 번역.소개한 나라이며, 또 가장 많이 팔린 나라다. '내 이름은 빨강' '하얀 성' '눈' 등 그의 주요 작품 대부분이 번역.소개돼 있다. 이번 주에 '검은 책'(전 2권, 민음사)마저 출간되면 파무크 전집은 얼추 모양새를 갖추는 셈이 된다.

한국에서 터키어 전공수업에 파무크 작품은 교재로 사용되고 있고, 파무크 작품을 한국에 널리 알린 번역가 이난아(40)씨는 파무크가 그냥 '나나'라고 부를 정도로 친숙한 사이다.

오르한 파무크는 누구 …

1952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잘살았다. 이스탄불의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어릴 적 꿈은 화가나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스물세 살 때였다.

82년 첫 소설 '제브네트씨와 그의 아들들'을 발표했고 85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 '하얀 성'이 "동양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뉴욕 타임스)는 격찬을 받으며 국제적 작가로 거듭났다. 이어 90년 발표한 '검은 책', 98년 발표한 '내 이름은 빨강'도 잇따라 큰 성공을 거뒀다. 파무크는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저녁마다 만년필 잉크가 얼마나 줄었나를 보며 하루를 되돌아본다"고 그는 말했다. 집필 노트엔 무수한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건축가가 설계하듯이 소설을 구성한다. 테러 위협과 바쁜 일정에도 최근엔 '순수 박물관'이란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그는 말했다.

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