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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롯데그룹 분위기 확 바뀐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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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 주가가 왜 이 모양이오.”

지난해 여름 신격호(85) 회장이 참석한 롯데쇼핑의 임원회의. 분위기는 내내 무거웠다. 그해 2월 상장한 롯데쇼핑의 주가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상장 이후 공모가(40만원)를 밑돌더니 급기야 시가총액에서 신세계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었다. 유통업을 시작한 뒤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신 회장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롯데가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신동빈 롯데 부회장

하지만 신 회장의 차남 신동빈(52ㆍ사진) 부회장은 이런 회사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주가 자체보다 롯데쇼핑이 내놓았던 ‘장밋빛’ 실적 전망을 문제 삼았다.
“이런다고 주가가 올라갈 것 같습니까. 나도 애널리스트를 해봤습니다. 시장 앞에 겸손해지세요.”

이런 질책이 이어지자 롯데는 부랴부랴 실적 전망치를 낮춰 다시 기업설명회(IR)를 열었다. ‘시장을 이해하라’는 신 부회장의 주문은 쇼핑의 상장을 전후해 여러 차례 계속됐다. 전문가를 데려다 임직원들에게 IR기법을 강연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신 부회장의 첫 기자간담회에서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었다.

“앞으로 주가가 얼마가 된다는 이야기는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얘기다. 주가는 시장이 정하는 것이다.”

롯데는 이른바 ‘시장친화적인 기업’은 아니었다. 재계에서 손꼽히는 ‘현금 부자’인 만큼 기업공개에도 소극적이었다. 롯데쇼핑이 상장하기 불과 반 년 전까지도 신 회장은 “상장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돈이야 들어올지 모르지만 주주들의 요구가 쏟아질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경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아버지의 고집을 돌려놓은 사람이 바로 신 부회장이었다.

그리고 1년 반이 흐른 지금, 롯데에는 ‘조용한 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변화는 임직원의 옷차림에서부터 나타난다. 롯데는 이달부터 전 계열사에 자율복장 근무제를 도입했다. 신 부회장 스스로 넥타이를 풀었다. 그는 “캐주얼의 시대인데 패션사업을 하는 회사가 정장만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며 이를 밀어붙였다.

롯데가 벗어던지고 있는 것은 정장과 유니폼만이 아니다. 그간 롯데의 전문경영인들은 하나같이 ‘은둔의 경영자’로 불려왔다. “장사하는 사람이 나서기 좋아하면 필시 망한다”는 신 회장의 지론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롯데 CEO들이 부쩍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철우 롯데백화점 사장이 대표적이다. 올 초 그의 취임 일성은 “협력업체를 섬기겠다”였다. 막강한 바잉 파워(구매력)를 기반으로 협력업체를 압박하던 관행에서 벗어나겠다는 반성이었다. 직원들이 협력업체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던 회사가 이제는 노트북을 나눠주며 현장으로 나가라고 독려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CEO의 주문에서 ‘뭘 하지 마라’보다 ‘무엇을 하라’는 요구가 많아진 것 자체가 큰 변화”라고 말했다.

인적 구조조정도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 롯데백화점은 과장급 30여 명에게 ‘권고사직’ 형태의 인사조치를 했다. 종신고용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롯데에서 벌어진 일이라 시중에선 화제가 됐다. 외환위기 이후 꾸준히 있었던 일이라는 게 회사 측의 해명이다. 하지만 규모만 봐도 예년보다 3배가량 커졌다. 지난해에는 롯데호텔이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외부 영입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롯데맨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기존의 기업문화가 워낙 보수적이었던 탓에 변화의 체감도는 외부의 생각보다 크다. 젊은 직원들에게선 우려보다는 기대감이 읽힌다. 하지만 한 직원은 “기존의 경영방식에 익숙한 ‘윗급’들 중에선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도 보인다”고 말했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신 회장 부자의 리더십은 시장에 대한 태도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해 롯데 내에서 회자되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몇 년 전 아침에 출근해보니 사내 브라운관 TV가 LCD TV로 바뀌어 있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멀쩡하게 잘 나오는 TV를 바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잔돈 하나까지 꼼꼼히 따지는 탓에 ‘짠돌이’ 소리를 들어온 게 롯데인데….”

교체 지시를 내린 것은 신 부회장이었다. “가격 차이는 별로 없는데 브라운관이 공간을 많이 차지해 비효율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LCD TV에서 읽히는 신 부회장의 경영 키워드는 ‘효율’ 그리고 ‘트렌드’다.

 반면 신 회장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건 ‘소방훈련’ 이다. 롯데에선 정기적으로 전 임직원이 참가하는 강도 높은 소방훈련이 실시된다. 다른 기업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문화다. 새 건물이 들어서면 신 회장이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소방 등 안전시설이다. 여기에는 롯데 특유의 ‘꼼꼼함’과 ‘내실’의 키워드가 담겨 있다. 신 회장은 사업 초창기 도쿄에 세운 첫 오일공장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큰 위기를 맞았던 경험이 있다.

 오너의 젊은 시절 경험은 경영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준다. 신 회장이 직접 말뚝을 박아 공장을 지었다면, 신 부회장은 증권사에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디뎠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MBA 과정을 마친 그는 1981년 노무라증권의 런던지점에 들어가 7년간 근무했다.

 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빅뱅이 한창 진행되던 런던에서 선진 기업들의 재무관리와 국제금융 시스템을 피부로 느끼고 왔다”고 말한다. 당시 빅뱅을 이끈 대처 총리는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금융귀족’들이 지배해온 보수적인 런던의 금융시장을 일거에 뒤흔들어 놓았다. 이는 곧 활발한 기업 인수합병(M&A)과 구조조정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기틀을 만들었다.

 신 부회장은 기업공개와 함께 인수합병, 해외진출로 롯데의 빅뱅을 유도하고 있다. 올 3월 중국에 지주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 오는 8월 모스크바에 백화점을 열 예정이다. 한국투자증권 이경주 선임 애널리스트는 “신 부회장이 해외 사업을 주도하면서 공격적인 투자가 진행되고 있고, 해외 업체인 허쉬와 공동 경영에 나서는 등 과거보다 경영전략이 한층 유연해졌다”고 평가했다.

 신 회장의 ‘내실 경영’은 롯데가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재계 5위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업문화가 지나치게 보수화하면서 조직이 변화에 둔감해졌다는 지적도 받아왔다. ‘소방훈련’을 놓고 롯데 직원들 사이에서는 “좋은 자리에 점포 내놨으니 불만 안 내면 망할 일이 없다는 뜻”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롯데가 ‘지키기’에 열중하다 시장의 트렌드를 놓친 대표적인 사례가 할인점 사업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유통시장의 중심축은 할인점으로 옮아갔다. 이런 변화를 먼저 읽고 과감한 투자를 한 신세계는 지난해 유통부문 매출에서 롯데를 제치고 ‘왕좌’에 올랐다. 욱일승천하는 신세계와 롯데쇼핑의 주가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시장이 롯데에 요구하고 있는 건 미래 성장에 대한 확신이다. 신 부회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추진력이다. 그는 지난해 롯데쇼핑의 상장으로 얻은 막대한 자금을 들고도 까르푸, S-Oil 인수전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아버지 시대의 업종 경계를 무너뜨리고 친인척이 발을 담그고 있는 홈쇼핑ㆍ여행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마찰음도 크다.

 롯데는 지금 LCD TV와 소방훈련이 공존하는 과도기다. 2005년 이후 대규모 인사가 이어졌지만 아직 명실상부한 ‘신동빈 체제’는 아니라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인재가 부족하다”는 말도 자주 한다고 한다. 과도기에는 사고도 빈발하는 법이다. 지난해 롯데월드에서 벌어진 일련의 안전사고가 대표적이다. 신 회장이 직접 대소사를 챙기던 시절이라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될 만한 사업이나 입지를 잡아내는 신 회장의 ‘감(感)’은 재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며 “이를 실적으로 넘어서는 것이 신 부회장의 과제”라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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