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탈주를 꿈꾸는 현대인의 자화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호 21면

몽글몽글한 점(dot)들이 뭉쳐 이루는 형체 속에서 호랑이ㆍ얼룩말ㆍ기린ㆍ사슴이 뛰논다. 동물들의 형상에 겹치거나 드리우는 인간의 그림자는 왜소하고 연약하다. 인간이 바라보는 생태계가 아니라 생태계의 눈에 비친 인간을 보는 듯한 구성. 도치와 역전을 통해 인간-비인간의 우열관계를 전복시키는 ‘유목동물+인간’ 연작 시리즈(사진)다.

허진 작품전

호남 남종화의 시조인 소치 허련의 고손자 허진(46ㆍ전남대 미술학과 교수)의 작품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이다. 한국화의 전통 재료인 수묵 채색에 기반한 질감은 편안하고 아늑하다. 일상적 소재를 낯선 맥락에 배치하는 기법은 생경하면서 이채롭다. 동양화풍으로 표현된 초현실주의라고나 할까. 친숙한 사실성이 아니라 “현실적 맥락을 벗어난 데서 오는 일탈과 부정의 즐거움”(미술평론가 최광진)이 배어난다.

근작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동물들은 2002년 일본 여행이 배경이 됐다. 당시 작가는 일본 나라(奈良)공원 내 고후쿠지(興福寺)에서 동물들이 울타리도 없이 인간과 하나 되어 어우러져 노니는 모습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이전까지 현실비판적이었던 주제(‘익명인간’ 시리즈 등)에서 벗어나 생태 이미지의 재구성에 주력했다.

‘유목동물+인간’ 연작에서 인간의 이성은 동식물의 야성보다 우월하지 않다. 고구려 벽화에서 부활한 듯한 말과 호랑이는 지배자로서의 인간 개념을 무화시킬 듯 거대하다. 인간 형상은 작은 단위로 기호화되고 파편화되어 동식물 안에 기생하기도 하고, 무중력 상태에서 허공을 떠다니기도 한다. 언뜻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을 장식했던 마그리트의 ‘골콘드(겨울비)’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 세계에선 동물적인 것이 구체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힘이 세다. 이성이 구획 지어온 경계는 이 속에서 무력하고 덧없다. 최광진 평론가는 거창한 구획과 경계들을 무너뜨리는 허진의 작품에서 탈주의 해방감을 읽는다.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초원에서 뛰놀고 싶은 욕망. 탈주를 꿈꾸는 한 우리는 모두 유목민이다. 허진이 그린 유목 동물들은 결국 현대인의 자화상인 셈이다. 전시장에서 우리는 억눌려 왔던 내면의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