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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내가 쟁취하는 거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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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12면

전업주부로 평탄하게 살아온 주인공 도시코는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 뒤 자신의 삶이 얼마나 뒤틀린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정년퇴직한 남편이 3년 만에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 일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남편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것도 무려 10여년 동안. 미국 LA에서 가게를 하던 아들은 귀국하겠다면서 집을 내놓으라 하고, 딸은 남자와 동거를 하며 분방하게 살아간다. 전업주부로 평온하게 살아왔던 도시코는 자신의 인생이 뒤틀린 것이었음을 깨닫고 방황하다가, 재생의 길을 선택한다. 제목인 ‘다마모에’는 ‘육체는 점점 쇠약해져 가지만 영혼은 갈수록 더욱 불타오른다’는 뜻이다.
‘KT’ ‘클럽 진주군’ 등 무거운 주제의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신작 ‘다마모에’는 60을 눈앞에 둔 여성에게 닥친 일상의 시련을 그린 영화다. 오로지 가정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소중하게 가정을 지켜온 것일까? 그럴 만한 가치가 과연 있었던 것일까?
 
‘단카이 세대’ 여성의 홀로 서기
‘다마모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사회 현상을 약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도시코와 남편은 일본에서 말하는 소위 ‘단카이(團塊) 세대’다. 1948년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로 60∼70년대 젊은 시절에 치열한 안보투쟁을 경험했고, 사회에 나가서는 일본 경제성장의 핵심이 되어 ‘회사인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밤낮없이 일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회사에 헌신하는 동안 여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전 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의 소용돌이를 체험했던 여성들은 가정에서 대체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도시코는 언제나 오후의 명화를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영화 애호가이며, 설거지하면서도 뉴스에서 전해지는 미국의 횡포를 걱정하는 여성이다. ‘단카이 세대’는 누벨바그로 대표되는 ‘영화’에 열광했고,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전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평화롭게 전업주부로 살면서도, 도시코는 여전히 그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신작 ‘다마모에’

도시코는 과거의 이상을 믿으며,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배신과 외로움뿐이었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면서 자신을 속였고, 애인과 소바(국수) 가게까지 열었다. 자신에게는 농담 한마디 하지 않는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애인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재미있는 남자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리로 나가 방황하던 도시코는 다시 한번 ‘세상’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 자신이 반했던 것,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마모에’는 여성의 마음을, 그 안에서 불타오르는 열정을 아주 예리하게 잡아낸다. 그것은 분명 원작의 힘이다. ‘다마모에’의 원작은 미스터리 소설 작가로 알려진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가 200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대도시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성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쓰고, ‘문학 속에서 주부가 그려지는 방식에 불만이 있었기에 새로운 방식으로’ ‘아웃’을 쓰는 등 여성의 내면을 제대로 응시하고, 처절할 정도로 예리하게 폭로하는 여성 작가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에도가와 람포상, ‘부드러운 볼’로 나오키상을 받았고 그 밖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즈미 교카상, 시바타 렌자부로상, 부인공론문예상 등 수많은 상을 섭렵하며 일본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영어로 번역된 ‘아웃’이 미국 에드거상 후보에까지 오를 정도로 탁월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면서도, 그 장르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기리노가 그리는 것은 인간, 특히 여성의 어둠이다. “어디에서나 행복과 즐거움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소설에서만은 어둠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기리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불안ㆍ공포ㆍ폭력ㆍ질투 등 어두운 면에 천착해왔다.
 
‘세상 모든 것을 회의하라’
근작인 ‘다마모에’ 역시 빛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작품이다. 하지만 ‘다마모에’는 어둠에 갇힌 여자의 불안이나 공포, 질투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범죄가 아니라 일상의 어둠을 그린 ‘다마모에’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자기 세대의 시선으로 일상을 이야기한다. 도시코가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되살리며 보는 오래된 필름에는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보트를 타고 놀거나,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기리노의 젊은 시절이다. 1951년생인 기리노가 대학에 입학한 70년은 일본의 학생운동이 절정기였을 때다. 한국의 80년대가 그랬듯이, 그 시절의 기리노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술 마시고, 노래를 하며 청춘을 보냈다. 혼돈의 그 시절에 기리노가 배운 것은 하나였다고 한다. ‘어떤 것이든 회의적으로 대하라.’ 대학을 나와 잠시 취직을 했다가 전업주부가 된 후에도, 기리노는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 기리노는 이 세상이 결코 행복한 원더랜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의적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

‘다마모에’는 그 어둠을 본 후에 찾는 빛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냥 찾아지지 않는다. ‘내가 생각만 바꾸면 세상이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도시코는 금방 그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알고, 하나씩 배우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남편과의 인생이 어둠이었다 해도 아직 그녀에게는 약 30년 정도의 미래가 남아 있다. 그것을 자신이 쟁취하면 되는 것이다.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만 사로잡히거나, 후회하는 대신. 세련되진 않지만 지나칠 정도로 성실한 사카모토 준지는 기리노 나쓰오의 ‘다마모에’를 완만하게 영상으로 옮긴다.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도시코의 ‘다마모에’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어둠을 이겨내는 빛의 힘이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을 알고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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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씨는 영화·만화·애니메이션·게임·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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