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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작가 한수산이 본 이모저모|의식화·규격화된 삶의 형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아이들을 다 출가시키고 정년퇴직한 남편과 둘이 살고 있는 니시무라 부인이 책을 빌려간 적이 있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나온 일어판도록이었다. 며칠 후 책을 돌려주러 온 부인이 빌려갔던 책 위에 작은 봉투를 하나 얹어 가지고 왔다.
조그마한 민예품 쥘부채였다. 책을 빌려주어 고맙다는 작은 답례였지만 이런 되갚음은 일본에선 일상적인 예의의 하나다.
문제는 그 부채를 싼 모습이었다. 부채를 엷은 한지로 싸서 까만 종이곽에 넣고 그 곽을 또 보랏빛 종이로 싸고 그것을 다시 닥종이로 된 봉투에 넣어 그 봉투를 색지로 싸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차마 버리기에 아까운 예쁜 종이들이어서 딸아이에게 모아두라고 주었다.
집의 아이들이 다니는 음악학원 무라마쓰의 선생님들이 한국에 연주여행을 갔다 와서 역시 본바닥 김치는 맛있더라고 했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포장마차에서 먹은 우동이 기가 차더란다(맛있는게 얼마든지 더 있는데 하필 포장마차람).
그래서 하루는『우리 집에 김치 드시러 오시지요』하는 말로 저녁초대를 했더니, 한 번은 부부가 함께 왔다. 이 젊은 부인이 들고 온 선물이 세 장의 비누였다. 세 장의 세수 비누를 가지고 오는 그 센스도 젊고 신선해 보였지만 그 비누를 싼 모습이 마치 보석 같았다.
주먹크기의 조그마한 대나무바구니에 비누를 마치 과자를 싸듯 셀로판지로 싸고 그것을 노란 색지를 깐 바구니에 넣은 후 리번을 매고 그것을 또 잔물방울무늬가 있는 투명 종이로 싸서 복주머니 모양으로 주름을 넣어 잡아매지 않았는가. 그 모양이 하도 앙증맞아서 한동안 그 비누는 쓰여지지 않은채 거실 탁자에 꽃처럼 놓여 우리 가족을 즐겁게 했다.
모든 것을 양식화 또는 규격화하는 일본인들에게 있어 선물 포장 또한 그것과 이어지는 정서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좀 난폭한 비교가 되겠지만 일본에 있으면서 조금 부끄러울 때가 한국에서 책이 소포로 보내져 올 때다. 누런 봉투에 검은 철끈으로 한번 묶어서 보내는 이 책 봉투가 내 손에 도착할 때면 네 귀퉁이 가운데 두 군데쯤은 터지고 찢어져 너덜거린다.
정기구독하고 있는 잡지도 부쳐오는 단행본도 거의 예외가 아니다. 참 무심하고 부실하다.
그런데 포장이 터져 책이 삐죽이 튀어나오는 소포가 오는 것까지는 좋다. 이 부실한 포장을 일본 우체국은 그냥 두고보지 않는다. 너덜거리는 책 봉투를 방수가 되게 비닐봉지로 싸곤 또 거기에「포장이 파손되어 저희들이 마음대로 재포장했습니다. 죄송합니다」하는 말을 써 붙인다(이 사람들이 누구 약을 올리나).
왜 이렇게 봉투가 찢어지게 싸서 보내는가 살펴보면 그 원인의 하나가 봉투가 얇기도 하지만 언제나 책에 비해 봉투가 크다는데 있다. 봉투가 크니 더 잘 찢어지는 것이다.
물건을 포장하는데 있어 일본이 너무 많이 싼다면 우리는 그와 달리 너무 크게 싼다. 과다포장과 과대포장이다.
한 나라는 작은 것을 너무 크게 싸고, 또 한 나라는 그만 싸도 좋을 것을 무슨 원수가졌다고 싸고 싸고 또 싼다. 심하게 말해 이러다가 일본은 죄를 받아 망하지 싶을 때가 많다. 자원의 낭비라고 생각될 정도로 싸고 또 싸는 것이 일본의 포장이다.
이러한 모습이 단순히 물건을 포장할 때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 일본이다. 모든 삶의 형태를 의식화 혹은 양식화하는 문화의 하나가 바로 물건을 쌀 때도 그렇게 나타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관혼상제를 비롯한 통과의례도 싸고 또 싸는「형식」이 강조된다. 전통 씨름 스모만 해도 그렇다. 단 몇 초에 끝나는 대결을 앞두고 두 선수가 소금을 뿌려가며 몇 분 동안 의식을 진행한다. 여기엔 장사들이 땅을 밟아주어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가 들어있긴 하지만 이처럼 어떤 행사나 모임에서 절차와 의례가 두드러진다.
어쩌면 헤어질 때 수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나누는 그들의 인사도 이「싸고 또 싸는」행위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오죽 인사를 많이 했으면 어느 기업에서 국제전화를 할 때만은 인사를 한번만 하라고 해서 불필요한 경비를 줄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전해질까.
일본 교통안전 표어의 하나에 이런 말이 있다.「좁은 일본,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는가」. 천천히 안전운행을 하자는 뜻이다. 일본이 스스로 자기 나라를 좁다고 하는 이 표현이 나는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금수강산 삼천리라는 말로 아주 큰 나라로 표현한다. 나라까지도「푸지근하게」커야 되는 게 우리들이다. 과대포장해서 책 봉투 하나 정도가 터지고 너덜거리는 것은 참아 줄만 하지만, 글쎄, 북방외교 하면서 돈 팡팡 쓰듯이 나라까지도 과대포장해서 너덜거리게 만드는 건 아닐까. 안해도 좋을 걱정을 하게되는 것이 두 나라의 포장을 보며 느껴지는 씁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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