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 옛말… 지상과제는 “취업”(대학가가 변했다: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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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입학 하자마자 “직장 걱정”부터/「고3」보다 「대4」가 더 열심… 그래도 불안
대학이 변하고 있다.
「민주화 시민항쟁」의 80년대를 지나 이념퇴조의 9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 대학과 대학문화는 그 흐름과 빛깔이 빠른속도로 바뀌어간다.
이념 대신 실리가,공동체적 가치 대신 개인의 안락한 삶이 추구되면서 지난 한세대 가까이 우리 대학을 특징지웠던 과격한 정치구호·시위가 올들어 사실상 사라졌다. 반면 불황과 함께 닥친 극심한 취업난속에 대학 강의실은 취업학원으로 변모해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소비,향락,퇴폐,불건전 외래문화의 분별없는 수용 등 부정적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과연 대학이 서야할 바른 자리는 어디인가. 내면에서 격동하는 오늘의 대학가,대학문화의 현주소를 시리즈로 엮는다.<편집자주>
『나도 실업자가 되는게 아닐까.』
이른바 「명문」으로 꼽히는 A대 국문과 4학년 이모군(26)은 1일 실시된 대기업 공채시험을 치른후 마음이 더 불안하다.
4학년 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도서관으로 나가며 고3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지만 자신이 지원한 S그룹 영업직의 실질경쟁률이 10대 1이 넘는다는 소문을 들은후 도서관에서 매일 마주치는 많은 선배 졸업생들처럼 자신도 취업재수생이 되어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졸업 후까지 도서관을 드나들게 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86년 입학했다가 89년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올봄 복학한 이군은 학기초인 4월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대성리 유원지로 신입생 환영MT를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운동권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입생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PD와 NL은 어떻게 다르냐』는 등 학생운동에 관련된 것일줄 짐작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후배들의 관심은 『선배들은 주로 어떤 회사에 취직하느냐』『군대는 언제 가는 것이 좋으냐』는 등 취업에 관련된 것이 전부였다.
『제가 군대를 가던 89년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는데 정말이지 세대차를 느꼈습니다.』
이군의 말마따나 「80년대 졸업생도 오늘의 대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만큼 최근 2∼3년새 대학은 변했고,변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현상은 극심한 취업난에 따른 학생과 대학 당국의 초조한 대응이다. 「구직지상」이라고 할만큼 총력대응 태세를 보이면서 일견 바람직스런 대학가의 면학열기가 대학을 점차 취업학원으로 변질시키는 양상이다.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비교적 점수가 후한 「여성학개론」「음악학개론」 등의 교양과목에 수강신청자가 몰리고 국제화 추세에 따라 특별수요가 느는 일문·중문과의 입학점수가 영문과와 맞먹을 정도로 높아졌으며 과거에는 별관심을 못끌던 유아교육과가 여학생들에게 큰 인기인 것 등은 모든 대학에 나타나고 있는 공통현상이다.
이념서클에 신입생들이 들어오지 않아 서클명맥이 끊길 지경이라는 얘기는 벌써 오래됐다.
최근 한 대학의 학교 신문 수습기자 모집에는 과거 10대 1을 넘던 높은 경쟁과는 달리 10명 모집에 고작 20명이 응시했다.
「신문사에서 일한다고 언론계에 취직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운동권으로 찍혀 취업에 방해된다」는 것이 그 이유.
취업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대학도서관은 매일 밤 늦게까지 불야성이다. 많은 대학 도서관이 개관시각인 오전 6시에 오지 않으면 자리를 못잡을만큼 시설부족 상태다.
3일 밤 C대 도서관을 꽉 채운 학생들의 책상에 놓인 책중 가장 많은 것이 토플수험서. 한사람 건너꼴로 펴들고 암기에 여념이 없다.
일부 대학에서는 이같은 학생들의 「필요」를 수용,토플성적을 아예 학점에 넣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과연 상아탑은 오늘의 대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흘러간 넋두리」일까.<한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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