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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복사기와 정보사회|백석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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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복사기만큼 요즘의 우리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기제도 없을 것이다. 관공서·회사·학교 할 것 없이 어디에나 복사기가 있다. 학교 주변이나 주택가에는 으레 복사전문점이 한 두군데 자리잡고 있다. 읍·면·동 같은 공공기관의 대 국민서비스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요새 복사기는 단순 복사만 하지 않는다. 활자 크기·밝기·컬러복사·원고편집·합성까지 못하는게 없다. 컴퓨터기능이 내장돼 있어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동화되고 있다. 또 메카트로닉스적 고급기술이 추가되고있어 기능은 점점 다양·정밀해지고 있다.
불과 10여년만에 이런 복사기가 국내에 10여만 대가 보급되고 연 30%씩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기성사회인들 중에는 지금도 어렵사리 빌린 노트를 밤새우며 베껴 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사서삼경』같은 고전이나『심청전』『춘향전』같은 소설류를 몽땅 베껴 책으로 엮는 일이 흔했다.
아직도 전통 있는 가문이나 고 서점을 뒤지면 정성스레 베껴 쓴 필사본 책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치 있는 지적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이 정도의 노고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풍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작은 책 한권 속에도 남다른 정성과 숨결이 깃들인 그 시절의 추억 만들기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인간생활 전반에서 지적교류가 너무도 쉽고 빠르게 이뤄지게 된 것이다.
특히 복사기가 사무실에 미친 영향은 가위 혁명적이라 할만하다. 사무업무의 신속성·실용성·정확성뿐이 아니다. 정보의 공유가 쉽게 이뤄져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능률적인 회의문화를 꽃피게 하는데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새로운 후유증도 함께 잉태하게 됐다. 한때 외국의 값비싼 전문서적을 복사책으로 만들어 팔아 국제사회에서 악명을 날린 것도 이 복사기 때문이다.
지폐·유가증권·입장권·고서화의 위조품이 유통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컴퓨터사회가 지향하는「종이 없는 사회」(Paperss Socieety)와는 정반대로 복사지를 남발하는 자원낭비의 악습을 낳게된 것만 봐도 그렇다. 이 모두 무형가치는 공짜라는 정보가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보를 소중히 관리하는 습관, 이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정보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정보문화센터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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