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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 총재|고향방문 길 트는 「구호의 대모」|역대 11명중 4명이 총리 출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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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정치적 격변기, 각종 재해 때마다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돌봐야하는 「구호의 책임자」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피로 얼룩진 현장, 77년 이리역 폭발 참사현장 등 궂은일만 나면 맨 먼저 달려가 뒤치다꺼리를 하는 적십자활동의 총사령탑이다.
더욱이 한반도의 허리가 두동강 난 우려 실정에서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인도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정치적 물감」이 적든 많든 스며들 수밖에 없는 남북대화의 구심점 역할까지 맡아야 하니 결코 만만한 자리는 아니다.
그런 만큼 정부수립 후 지금까지 강영훈 현 총재(18대)를 비롯해 모두 그 시대의 원로들이 책임을 맡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한제국의 대한적십자사(초대총재 의양군 이재각) 상해임시정부·미군정치하를 거쳐 현재의 대한적십자사형태를 갖춘 뒤 총재를 지낸 11명 가운데 유창순(15대·현재 전경련회장 겸 롯데회장)·김상협(16·17대)·강영훈씨 등 3명이 국무총리출신이고 경성방직·동아일보사장도 지낸 최두선씨(7~10대)는 총재 재직 중 고 박정희 전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돼 총리와 총재를 겸직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들뿐 아니라 고 윤보선 전대통령(2대)과 외무장관·주미대사 등을 지낸 김용식씨(14대), 초대 주영대사·공화당 정책위의장 등을 지낸 김용우씨(11대)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대한적십자사의 총재를 우리 사회의 「거물급 인사」가 맡아온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지만 법에 의해 대통령이 명예총재를 맡도록 돼있는 유일한 케이스인 점도 특이하다. 노태우 대통령도 대한적십자사조직법 제14조에 따라 명예총재로 돼있고 국무총리는 명예부총재다.
홍수·대형화재 등 각종 천재·인재가 발생할 경우 민관이 유기적으로 협조해야함은 물론 남북대화·고향방문추진이나 최근 이뤄진 소련사할린교포 영주귀국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외무·국방부 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한적이 역대정권에서 정치바람을 타는 측면이 없지 않다는 비판을 일부에서 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양주삼 초대총재는 6·25때 납북됐으며 2대 윤보선·3대 구영숙 총재는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맨주먹으로 적십자활동을 펴야하는 곤욕을 치렀다
윤보선 2대 총재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하와이·일본 등 재외동포들이 보내온 구호물자를 챙겨 경기도일원의 피난민들을 돕고 소독·예방접종과 간단한 진료사업이나마 펼 수 있는데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세브란스의대 교수출신으로 초대 보건부장관을 지낸 구영숙 3대 총재는 52년11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적십자국제회의에 처음으로 우리나라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 배한 공산군의 비인도적 만행을 고발해 「한국에 있는 포로문제」 등 결의사항이 채택되도록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이듬해 7월에는 휴전협정 조인으로 포로교환업무에도 참여, 9만5천명의 포로를 송환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4∼6대 총재를 지낸 고 손창환씨는 재임기간중인 55년8월 대한적십자사를 국제적십자사연맹에 가입시켜 『한적을 세계 속으로 발돋움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57년부터 2년10개월간 보건부장관을 겸직했다. 그는 59년 일본·북조선적십자사가 재일 동포 북송을 실행하자 우리 정부와 공동으로 일적 측에 강력히 항의하는 등 정치적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
고 최두선씨는 60년8월부터 72년8월까지 만12년2일간 대한적십자사총재를 지내 역대 총재 중 최장수를 기록했다.
그는 또 재직 중 이른바 「방탄내각」으로 불리던 내각에 첫 민간인 출신 국무총리로 영입돼 화제를 뿌렸으며 동서냉전 속에서 남북대화의 길을 트는가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예산을 아껴 쓰지 않는다고 호통을 쳐 직원들이 종이 한 장, 볼펜 한 자루를 허투루 쓰지 못할 정도였다
김용우 11대 총재는 물꼬가트인 남북대화를 진행시켰으나 북한측의 지나친 정치적 저의 때문에 때론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연희전문 수물과 졸업 후 미국유학시절 접시닦기·자동차정비 등을 하며 어렵게 공부한 때문인지 당시 박봉에 시달리던 직원들의 봉급을 공무원 수준으로 크게 올려 감사원의 지적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2·13대 총재였던 이호씨는 준장으로 예편한 뒤 법무·내무장관과 합동통신회장·주일대사 등을 거쳐 75년 적십자사총재로 임명됐다.
6·25후 군인으로 포로교환업무에 참여해 적십자활동과도 다소 인연이 있는 이씨는 76년 초 박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낙도주민들에 대한의료봉사 필요성을 역설해 7천5백만 원을 전격 지원 받아 국내 첫 적십자병원선인 「백련호」를 바다에 띄웠다. 대한적십자의 사업이 가장 많이 확장된 때도 바로 이총재 재임기간이었다. 혈액관리협회를 인수해 「매혈」을 「헌혈」로 바꿔 뿌리내리게 했으며 서대문적십자병원의 현대화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것도 이때다.
또 남북적십자 본 회담 등이 잇따라 열려 이씨는 국방부·안기부 등과의 의견교환에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박동선 파동으로 주미대사를 하다 81년 귀국해 적십자사총재로 자리를 옮긴 김용식 제14대 총재는 외교관출신답게 『국제적십자회의 등에서도 북한에 지지 않도록 참가자 수 등 모든 면에 모양새를 갖춰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82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 조직위원장으로 옮기기까지 1년여의 짧은 기간 재직하는 동안 그는 직원들에 대한 훈시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시절 훗날 총리를 지낸 변영태씨가 불러 가보니 이대통령이 「만」자를 한지에 붓글씨로 쓴 종이 한 장을 내던져주며 외교관으로 나가라고 해서 초대 홍콩 총영사로 부임했다』는 회고담과 함께 적십자활동에도 외교측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은행총재·상공부장관·국무총리 출신의 유창순 총재는 성품이 온화하고 강직하며 업무를 따지는 바람에 직원들이 애먹었으며 60년대에 「사상계」편집위원을 지낸 때문인지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진보적이었다는 평.
그는 83년 6월30일 시작된 KBS-TV의 이산가족 찾기 특별생방송이 전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자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지방지사를 풀 가동, 이산가족명부를 작성토록 하고 여의도에 「만남의 광장」을 설치, 11월14일 종방되기까지 진두지휘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했다.
고려대총장·국무총리를 거쳐 16·17대 한적 총재를 역임한 김상협씨는 85년 남북고향방문단 인명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으며 총재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홍십자회를 찾아 양국 적십자사간 교류의 길을 텄다..
그는 또 총장시절 『우리 고대인은…』이라며 일체감을 강조했던 것처럼 총재 때도 『오늘을 사는 우리 적십자인들은…』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 직원들에게 한솥밥을 먹는 식구임을 느끼게 했다.
김 총재는 기회 닿을 때마다 『사람은 항상 어디에 가서 일을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임기를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직원공채 제도를 뿌리내려 「정신적 스승」으로 통했다.
현재의 강 총재는 대한적십자사 창립기념일인 지난 27일로 임기3년 중 1년을 채웠으며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중립내각 총리·신당의 대선 후보 영입대상으로 거론됐으나 최근 『적십자활동이 이렇게 중요한지는 예전에 미처 몰랐다』며 한적 활동에 전념하고 정치에는 불참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김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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