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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걷고 싶은 길'을 생각한 도시학자

중앙일보

입력

12일 밤 서울삼성병원 영안실. 한 달전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를 네덜란드처럼 '걷기 좋은 나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던 그가, 영정 속에서 해맑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때만해도 그는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고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정정했던 그가 돌연 심근경색을 일으켜 이승을 하직했다니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위 김태진(43)씨는 " 중앙일보 기자들과의 만남이 사실상 '세상과의 마지막 대화'였던 셈"이라며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고인은 광주사범을 나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東京)대에서 도시설계를 전공하고 귀국한 그는 이 분야의 거목(巨木)으로 우뚝 섰다. 제작 상의 이유로 출고되지 못한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인터넷에 올린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편집자>

"당신, 도로 전문가라면서 그동안 뭐 했어요?"

모처럼 부부가 함께 나선 나들이길. 울퉁불퉁한 보도 때문에 넘어질 뻔한 그의 아내가 핀잔을 준다. "허허." 평생을 도시.도로.건축이라는 말을 화두로 삼고 살아온 강병기(75)씨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도시는 '보행자 중심'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강씨는 일본 도쿄(東京)대 대학원에서 도시설계분야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양대 교수로 근무했고 구미1대학 학장을 지냈다. 한국도시설계학회, 대한국토계획학회 회장, 교통개발연구원,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사장 등을 두루 지냈으며 현재는 건축?도시설계 전문업체인 공간 그룹의 상임고문이자 '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이하 도시연대)' 이사장이다.

도시연대는 1994년 마포구 연남동 시민교통환경연구소로 창립, 1996년에 서울시 보행환경기본조례를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인사동역사문화보존 운동과 걷고싶은 종로 만들기 운동, 북촌 가꾸기, 시청 앞 광장 설계, 한평 공원 만들기 등을 주도해왔다. 최근에는 한국 토지공사 온누리봉사단과 함께 수원시 매탄동 어린이 놀이터를 리모델링했다. 특이할 사항은 실제 사용자가 될 어린이 300명과 주민 70명이 디자인 설계과정부터 적극 참여했다는 점이다.

"공간 디자인에서 아름다움보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만족지수죠." 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인 도시가 더 쾌적하고 안전하기를, 그리고 문화와 역사가 살아 있는 공간이 되기를. 강씨와 도시연대는 지금까지 바로 이점에 초점을 맞춰 활동해 왔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죠. 그래서 찾아낸 키워드가 '걷고 싶은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활력이란, 결국 보행자 개개인의 걷기가 만들어내는 에너지 아닙니까? 차를 타려고 해도 일정한 곳까지 걸어가야죠. 그런데 걷고 싶어도 걸을 만한 길이 없다면, 또 걸으면서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을 느낀다면 그건 걷고 싶지 않은 도시죠."

강씨와 도시연대가 주장하는 '보행자 중심의 도시'는 노약자, 임산부, 장애인도 불편 없이 걸을 수 있고, 하이힐을 신은 여성도 편하게 걸을 수 있을 만큼 바닥재를 잘 선택하고 꼼꼼하게 시공된 길이 많은 도시다. "자동차에 길을 다 내주고 사람은 땅 속 지하도나 육교를 이용해 빙 돌아가야 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현재 도시연대가 서울시와 함께 '횡단보도 만들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길에서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무기질인 바닥이나 건축물은 스스로 변화할 수 없으니까 늘 똑같은 모습이어서 지루할 때가 많아요. 매일 옷을 갈아입고 다양한 표정을 연출하는 것은 길 양쪽에 늘어선 자연과 상점 풍경입니다. 그런데 뉴타운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이 훼손되고, 우리의 활기찬 골목길 문화가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걷기 예찬>의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모든 걷기는 계절을 탄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인류학적으로 인간은 직립 보행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게 됐죠. 시민 누구나 걷기 쉽고 존중받는 도시 만들기, 이것이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걷고 싶은 길'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보고 목소리를 높이세요."

서정민 기자(걷기 추진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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