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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386의 행진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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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보름 전쯤 대학교수 한 분과 점심 식사를 하고 K대 교정에 들어섰습니다. "사무실에서 차나 한잔 하고 가라"는 권유를 못 이긴 채 따라나선 겁니다. 사실 K대는 제 모교입니다. 어쩌다 근처를 지나칠 때 새 건물이 우뚝우뚝 들어서는 걸 멀찌감치서 봤습니다. 하지만 평일 날 캠퍼스 안에 들어선 건 거의 20년 만이었습니다. 감회가 새로웠겠다고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복사꽃처럼 해맑은 젊은이들로 가득 찬 캠퍼스는 밝고 찬란했습니다. 온갖 꽃이 만발한 화원에 들어선 듯했습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너 명씩 모여 까르르 웃어대던 맑은 목소리들이 알은체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번 시험 좀 쉽게 내주세요, 네?"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20여 년 전, 우리 386들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때의 풍경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땐 건물마다 '군사정권 타도하자'는 시뻘겋거나 시퍼런 플래카드들이 주렁주렁 내걸려 있었죠. 시위가 없는 날에도 학교 어디서나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도서관, 학생 식당, 교내 벤치를 가릴 것 없이 짧은 머리의 사복 전경들이 죽치고 앉아 학생들을 감시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정말 많이 변한 겁니다.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1980년대, 우리의 대학 시절은 온통 잿빛이었는데, 너희는 참 좋구나"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질투도 나더군요.

며칠 전은 6.10 민주화 항쟁 20주년이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민주화와 경제성장 중 뭐가 더 중요한가"라고 물었다지요. 80% 가까이가 "경제성장"이라고 답했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중앙일보 6월 11일자 사회면 톱기사 제목은 '힙합댄스.록 공연… 즐거운 추모'였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6.10 추모 행사 기사인데 거기서 록그룹 크라잉 넛과 여성 4인조 그룹 빅마마, 가수 심수봉이 노래했고 남녀노소 모두 환호했답니다. 행사에 참석했던 운동권 출신 가수 안치환이 말했습니다.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는 자리가 꼭 엄숙할 필요는 없다. 한바탕 신명나게 놀고 추억하는 자리여서 좋다." 6.10은 이제 축제가 된 모양입니다.

386 벗들, 누가 뭐라든 우린 성공한 겁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뤘습니다. 우리 세대는 최루탄 맞고 감방 가면서 군사독재와 싸웠고, 그래서 결국 이기지 않았습니까.

요즘 대학생들이 "민주화는 무슨, 취직도 안 되는데…"라고 말하는 걸 서운해 할 필요 없습니다. 국민이 정치에 신경 쓸 필요 없게 하는 게 가장 훌륭한 정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민주주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더 이상 민주화를 외칠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던 게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우린 꿈을 이뤘고 그걸로 보상받은 겁니다.

386은 이제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으로 사회의 중추입니다. 그런 우리가 꼭 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아버지 세대가 이룩한 산업화와 우리 세대가 달성한 민주화를 결합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겁니다. 우리 자식들이 세계 어디 나가서든 당당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배곯는 아이들 없게 하는 겁니다. 튼튼한 경제 만들어 취업 걱정, 퇴직 걱정 그만하게 하는 겁니다.

불행하게도 386 덕분에 권력을 잡은 정치인 일부는 세상을 거꾸로 사나 봅니다. 자꾸 시계추를 80년대로 되돌리려 합니다. 대결과 분열을 부추기고, 편 가르고, 증오를 불어넣습니다. 만날 과거 탓만 합니다. 자기 잘못은 쏙 빼놓습니다. 이들에게 언제까지 386의 대표성을 부여해야 할지 정말 의문입니다.

386 벗들, 20여 년 전 우린 길거리에서 피와 땀과 정열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양극화와 세계화 모두 피하지 말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진국이 됩니다. 6.10항쟁 20주년, 386의 행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