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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43. 월드컵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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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KPGA 회장을 지낸 홍덕산씨는 현재KPGA 시니어 회장을 맡고 있다.

내 골프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월드컵골프대회 최다 출전 기록을 갖고 있는 골퍼라는 사실이다.

아마추어선수들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서 입상하면 '국위 선양'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과거 프로들에게는 그런 찬사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프로는 돈을 벌 목적으로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나에게 "프로여서 훈장을 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훈장을 준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승리했을 때 국민은 자부심을 느꼈다. 또 박세리 선수의 LPGA 투어 첫 우승은 외환위기로 고통을 겪고 있던 국민에게 희망을 줬다. 그래서 프로인 그들에게도 '국위 선양'이라는 단어가 붙었고, 정부는 훈장을 줬다. 프로도 제대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나는 비록 훈장은 받지 못했지만 프로골퍼로서 무려 아홉 번이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나는 이것을 생애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연덕춘 선생과 박명출 선배가 제4회 캐나디언컵(월드컵 전신)대회 때부터 출전했다. 제7회 대회까지 빠짐없이 참가하다가 1960년엔 4.19혁명 여파로 불참했다. 사실 나는 월드컵대표에 열 번 뽑혔다. 61년 제9회 대회에 김학영 프로와 함께 참가하기로 돼있었는데 5.16 군사쿠데타로 출전이 무산됐다. 우리나라는 65년까지 이 대회에 불참했다.

내가 처음 월드컵(초기에는 캐나디언컵) 대회에 나간 것은 66년이다. 당시 나는 KPGA선수권과 한국오픈을 휩쓸며 독주했기 때문에 월드컵대회 출전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함께 참가할 한 명을 뽑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이순용 서울컨트리클럽 이사장이 "누구랑 함께 가면 좋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홍덕산과 함께 가고 싶은데 맘대로 됩니까. 예선대회를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 속으로야 아끼는 후배 홍덕산이 함께 가면 좋겠지만 주변에서 "한장상이 홍덕산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선발전을 열자고 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와 성이 같은 홍덕산에게 은근히 친근감을 느꼈다. 또 항상 나를 살갑게 대하는 그가 좋았다.

마침내 65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월드컵대회 출전 선수 선발전을 겸한 PGA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홍덕산은 1라운드에서 이븐파를 치며 공동선두로 나섰고, 2라운드부터 4라운드까지 나와 접전을 벌이다 결국 14오버파로 우승했다.

나는 라운드를 하면서 홍덕산에게 "잘 쳐, 여기서 우승하면 나랑 일본에 간다"고 격려했다. 나는 15오버파, 1타 차로 준우승에 그쳤다. 홍덕산의 KPGA선수권 우승으로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홍덕산과 나는 66년 제14회 캐나디언컵 국제골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개최지인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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