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지간의 국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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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때는 바야흐로「이조시대」라는 말이 요즘 바둑계의 유행이다.「이조시대]」는 .이창호-조훈현 시대를 일컬음이다. 과거에는 타이틀매치를 벌였다하면 조당현-서봉수 이었는데 지금은 거의가 조훈현-이창호이니 10여 년간의「조서시대」는 가고 마침내「이조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하필「이조시대」가 무언가. 조 9단이 스승이요, 이 5단이 제자이고 보면「조이 시대」가 옳은 수순(?)일듯 싶은데「이조시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관철동 기가 호사가들의 주장은「이서 시대」쪽이 부드럽고 신선미가 있는데다가 이조시대와 발음도 같아 더욱 어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기야 제자 이 5단이 8관 왕인데 비해 스승 조 9단은 4관 왕인 점을 감안하면「이조시대」의 역 수순을 탓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89년 말 용간 바둑지가 주관한「90년대를 전망한다」는 좌담회가 있었다.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조9단의 독주를 예상하는 가운데 필자는 이 5단의 급부상과 함께 세계 최강의 정예부대도 쫓길 때는 오합지졸과 다를 바 없는 법이므로 조 9단의 퇴조가 가속화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특히 국수전의 관전기를 담당하고 있는 정동식 4단은『조9단이 이 5단과 싸워 타이틀을 절반만 지켜도 대성공일 것이다』고 단언해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잔뜩 핀잔을 받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지적은 적중한 셈이다.
국수전은 이름도 좋고 역사도 길어 프로기사들이 애착을 갖는 기전중의 하나다. 이 국수 타이틀을 놓고 조·이 사제가 4년 연속 쟁탈전을 벌여 화제다.
89년의 제33기에는 이 5단이 스승에게 도전해 3대 0으로 일축 당함으로써「스승을 따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평을 들었으나 90년의 제34기에는 3대 0으로 간단히 빚을 갚고 15세 최연소기록으로 대망의 국수위에 등극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91년의 제35기에는 거꾸로 조 9단이 제자에게 도전장을 냈고, 제5국까지 끌고 가는 풀 세트 접전 끝에 극적인 역전 승을 거둬 영광을 되찾았다.
금년의 제36기에는 이 5단이 도전, 국수에의 집념을 불태웠으나 스승의 필사적 저항에 막혀 1승 3패로 실패하고 말았다.
국수자리를 놓고 사제가 네 번 싸워 스승이 세 번 승리한 것.
그런데 한가지 특기할 점은 과거에는 이 5단이 한 판 앞서면『이제 재미있게 되었다』고들 하더니 지금은 서 9단이 2승 1패로 앞서야 비로소『재미있어졌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승부세계의 무상함은 여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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