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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밑바닥에서 꿈을, 죽음에서 삶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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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영희(44)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과 이영광(41)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두 시집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는 비루한 삶에서 희망을 길어올리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그늘에서 삶의 기운이 돋아난다.

두 시인 모두 문단에서 밀어주거나 끌어주는 이 없다는 것도, 그런데도 시와 함께 산다고 주저 없이 밝히는 것도 닮아있다. 박영희는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적었고 이영광은 "다름 아닌 시와 더불어 고행(苦行)하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적었다. '누명'과 '고행'에서 시를 업(業)으로 삼는 자의 '자발적 버거움'이 읽힌다.

# 삶을 노래하다

여기 한 편의 시. 읽는 요령이 있다. 시가 묘사하는 풍경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저울눈금을 확인한 고물상 주인이 ㎏당 50원 하는 폐지를 부리다 리어카 밑바닥에서 젖은 라면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이런 일이 벌써 한두 차례 아니라며 남은 이보다 빠지고 없는 이가 더 많은 노인을 다그치자 재생이 가능한 폐지를 주워온 노인네는 요 며칠 궂은 날씨를 탓하여 본다.//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이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다.'

'즐거운 세탁'의 맨 앞에 실린 시 '고물상을 지나다'의 전문이다. 고단하고 퍽퍽한 고물상 노인의 삶이, 읽는 이의 눈을 할퀸다. 이 시는 전에 본 적이 있다. 박영희가 쓴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삶이 보이는 창)에서다. 시인은 거기에서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고물을 줍는 노인들의 삶을 묵묵히 전한 다음, 시인은 앞의 시를 적어두었다. 그리고선 "아프면 눈물이 나오지만 고통스러우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시의 제목은 지금과 달랐다. '삶'이었다. 하여 삶은, 고물상의 젖은 라면상자다.

# 죽음을 기억하다

'그늘과 사귀다' 초입에서 이영광은 '아버지 세상 뜨시고/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떵떵거리는'부분)고 부고(訃告)를 쓴다. 이어 한사코 죽음만을 기록한다. 아래는 그 세목(細目)이다.

①염습(殮襲):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몸이 씻겨지는 동안,/다른 몸들이 기역 니은 리을로/엎드려 우는 동안('황금 벌레' 부분)

②출상(出喪):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상여 하나 떠가네/제 발로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자의 집,/여러 몸이 메고 가네('수양버드나무 채찍'부분)

③하관(下棺):취한 몸을 리어카에 실어와 아랫목에 눕히듯/관을 내린다/…/맞지 않는 옷을 입고도 오늘은 신경질이 없어라/난생처음 오라를 지고도/몸부림이 없어라('나무 금강로켓'부분)

④기일(忌日):제상은 그의 돌상,/뼈에 붙은 젖을 물려주고/숟가락 쥐여주고/늙은 집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그를 키우리라('음복'부분)

⑤ …그 이후: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떵떵거리는' 부분). 하여 죽음은, 산 자의, 아니 죽음에 채 이르지 못한 자의 영역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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