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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아듀 200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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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올해도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 부르자. 세모(歲暮).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는 말보다 더 풍부하게 지난 1년을 표현하는 어휘는 많지 않다. 돌이켜 보면 올해도 우리는 참 다사다난하게 살았다. 엄밀히 따져 우리는 해마다 다사다난했다.

◆ 해넘이에 대하여

허구한 날 지고 뜨는 게 해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다. 그런데 굳이 12월 31일만 되면 그 해를 보겠다고 전국의 산과 바다가 몸살을 앓는다. 명소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날 밤은 거의 미어터진다. 새벽잠 설치고, 영하의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뻔한 해를, 그러니까 어제와 하나도 다름없는 모양으로 뜨고 지는 해를 보며 환호하고, 축제를 연다. 세상에 이런 소란이 없다.

이른바 '순례자'의 길을 걷기도 한다. 서해에서 일몰을 보고 밤새 달려 동해 일출을 보는 다부진 여정. 보통 충남 이북에서 해넘이를 했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안을 향한다. 전북 이남이면 남해안이나 부산으로 간다. 하룻밤 새 일몰.일출이 모두 가능한 데가 여럿인데도 굳이 밤새 차를 달린다. 이쯤이면 고행에 가깝다. 충남 서산의 간월도나 충남 서천 마량포구, 충남 당진군 석문면 왜목마을, 전남 무안군 도리포는 일몰과 일출이 모두 가능한 서해안의 명소다. 아니 당장 남해의 다도해만 가도 천지가 일몰.일출 명소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 소란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소란은 해넘이가 하나의 의례(儀禮)이기 때문이다. 해서 갖은 수고를 감내하고 여러 격식을 따지는 것이다. 그래야 '헌 해'를 털어내고 '새 해'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넘이는 미신에 가깝다. 씻김굿의 혼(魂)과 한(恨)이 배어 있다. 해를 보며 소원을 빌고 흥겨이 축제를 여는 건 해넘이가 상징이고 선언이자 의식이기 때문이다. 해넘이를 보겠다고 굳이 전북 부안까지 내려간 것도 이 때문이다. 올 한해 부안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 계미년이여, 잘 가시게

'핵 반대'라 쓰인 노란 깃발이 유독 눈에 띄는 부안 성당. 텅 빈 시내와 달리 성당 안은 북적거린다. 평생을 멸치잡이로 보냈을 법한 할아버지가 열변을 토한다. '핵'에 대해, '방사능 폐기물'에 대해. 지난 7월부터 '핵'이란 단어는 이 평화롭던 마을을 지배했다. 서해를 대표하는 천혜의 명승지라던 부안은 1년새 송두리째 바뀌었다. 조그만 항구 입구에도 전경이 진을 치고, 갯벌엔 노란 깃발이 장승처럼 서 있다. 읍내에서 가장 번듯했던 건물인 부안예술회관은 시위 때 불에 타 흉물이 됐다. 관광객은 지난해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주민들은 말을 아꼈고 이방인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해안도로를 따라 변산반도를 돌아 나오니 서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감돈다. 모항(사진)이란 작은 포구로 들어섰다. 예년엔 백합탕이나 들라며 아줌마들이 손짓이라도 했을 법한데. 포구에 정박한 어선은 오랜 세월 바다로 나간 흔적이 없다. 일몰이 다가왔다. 바다 오른쪽 저편에 바로 그 섬이 있다. 위도다. 하필이면 그리로 해가 떨어진다.

붉은 기운 사이로 태양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해를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하루에 두번뿐이다. 일몰과 일출, 그 찰나에만 태양은 제 속내를 허락한다. 하루종일 천지를 비춰도 지상의 미물(微物)은 감히 올려다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순간 이 못난 인간들이 잠시나마 경건해지나 보다. 그래서 이리도 소란을 피우나 보다.

수평선에 맞닿는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던 햇덩이가 제 몸을 산산이 부순다. 태양의 소멸. 이내 바다가 금빛을 이룬다(사진). 끝자락만 남은 몇줄기 햇살이 마지막 숨을 다해 바다를 비춘다. 꿈틀대며 반짝이는 바다 위로 광선이 길게 늘어진다. 겨울 낙조는 본래 따듯한 법인데. 위도 바다로 잦아드는 겨울 해는 외려 처량하다. 울컥, 서럽다. 그래, 가라. 묵은 감정, 노여움, 상한 마음, 세상의 온갖 풍진(風塵) 다 싸안고 가라. 훠이훠이~. 가라, 가버려라.

계미년(癸未年)이여, 잘 가시게. 부디 갑신년(甲申年) 새해엔 좋은 일만 있게 빌어주시게. 아! 해 넘어간다.

부안=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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