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고르비 감정대립 가열/헌재 출석싸고 팽팽히 맞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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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양식없는 사람”에 “차라리 감옥…” 악화일로/갈수록 반목 심각 인신공격 서슴지 않아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대통령의 반목이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두사람은 최근들어 상대방에 대해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어 이미 감정대립으로 치달은 상황이다.
최근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2일 러시아정부가 헌법재판소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르바초프에 대해 출국금지조치를 취하면서부터다. 당시 헌재는 고르바초프가 헌재에 계류중인 「공산당재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달라는 재판부의 요청을 거듭 무시하고 한국방문 등 해외나들이에 나설 채비를 갖추자 이에 제동을 걸었다.
「러시아판 뉘른베르크재판」으로 불리는 공산당재판은 지난해 11월6일 옐친대통령이 「소련공산당 및 러시아공산당 활동에 관한 포고령」을 발동,공산당을 불법화한 데 대해 전공산당원일파가 올해초 그 위헌여부를 가려달라고 헌재에 제소하면서 불붙기 시작했다.
지난 5월 1차공판을 열었다가 자료불충분을 이유로 휴정에 들어가 7월부터 재개된 이재판에서 제소자측은 정당해산권이 헌재에 있는데도 대통령이 포고령으로 이를 해산토록 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자 월권행위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피고격인 옐친대통령측은 공산당이 정당이라기 보다는 인권유린·국고유용·국제테러를 일삼은 범죄집단에 불과하다며 이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먼저 심판해야 한다고 맞섬으로써 자연스럽게 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에게까지 불똥이 튀게됐다.
이에 따라 헌재는 고르바초프에게 과거의 당활동에 대해 증언해주도록 수차례 요청했으나 거부되면서 내연상태에 있던 두사람의 대립이 본격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옐친측은 고르바초프의 출국을 금지하면서 국가원수까지 지낸 그가 기본적인 시민적 의무마저 지키지 않고 있다고 「양식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즉각 헌재가 옐친의 하수인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으며 공산당 재판이 정치재판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언요청에 응할 수 없다고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옐친대통령은 7일 고르바초프가 운영하는 재단사무실을 몰수하는 포고령을 발동,일단의 경찰들을 재단주위에 포진시키는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고르바초프도 이에 굴하지 않고 경찰에 포위된 채 8일 내외신기자회견을 통해 『그 어느것도 내마음을 바꾸게할 수 없다』며 『법정에 가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고 일전불사의 태도를 천명,두사람의 화해는 이미 물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옐친­고르바초프의 이같은 극한대립은 그동안 쌓여온 상대방에 대한 앙금이 이번 공산당 재판건을 계기로 폭발됐을뿐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퇴임이후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국내외에서 「체제도전적 발언」을 해온데 분개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지난해말 크렘린궁을 물러나온뒤 2주가량의 칩거끝에 지난 1월14일 헨리 키신저 전미 국무장관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옐친대통령이 국가를 벼랑으로 몰고가 인민의 신임을 잃고 있다』며 그를 제정러시아 차르(황제)에 못지않는 독재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정치불개입 약속」을 깨뜨린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옐친이야말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응수하며 『옐친의 예수가 아닌 이상 그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고 그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뒤집어놓기도 했다.
한동안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옐친측도 3∼4월에 접어들면서 고르바초프의 과거행적 폭로전으로 맞서기 시작,그동안 고르바초프가 국제테러단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는 등의 치명적인 비리를 들춰냈다. 지난 4월초 그를 자금 유용혐의로 조사하기도 했다.
옐친측은 이어 고르바초프가 열악한 국내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플로리다주에 호화별장을 구입하기로 했으며 돈에 맛들여 호화판 해외나들이를 계속하고 있다는 등 여론환기작업도 병행했다. 이번 출국 금지조치와 재단몰수 조치는 바로 이같은 「공작」으로 그에게 동정적이던 여론이 비판쪽으로 돌아섰다는 판단과 더이상 그를 방치할 경우 그가 반체제세력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각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는 옐친측의 의지표현이라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정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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