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서열 22위 “공작의 명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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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선노동당」사건 이선실의 정체와활동/17년간 세차례 남파 암약/북송 재일교포 「신순녀」 가명쓰며 국내에 거점 구축/민중당 당보에 축시 게재… 창당대회땐 “유공자”로
북한 권력서열 22위,서울 한복판에서 남파간첩 10여명을 거느리며 10년동안 「현지 공작지도부」를 지휘한 이선실(70·여)은 어떤 인물인가.
모두 세차례에 걸쳐 17년간 국내에서 암약해온 최고위급 간첩 이선실의 정체·행적을 안기부의 추적을 토대로 정리한다.
◇정체=현재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겸 대남심리전 공작기구인 「한민전」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선실은 63년 김일성에게 『조국통일사업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탄원,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북한의 간첩양성소인 「695 정치대학」에서 공작전문교육을 받았다.
이선실은 1차로 66년부터 71년까지 남파공작을 마친뒤 복귀한바 있으며 72년부터 75년까지,80년 3월부터 90년 10월17일까지 모두 세차례나 남파되어 대남공작 활동을 해왔다.
이선실은 북한 노동당 중앙당 금강학원을 수료하고 당경공업위원회 과장·황해도 여맹간부·평양시 여맹부위원장을 거쳐 대남공작원으로 활약해왔으며 79년에는 김정일에 의해 직접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발탁된뒤 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후보위원으로 승진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선실은 90년 월북에 성공한뒤 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으로 활약,올 9월9일 북한 정권 수립 44돌 행사에서 서열 22위로 발표돼 사회단체 담당비서 김중인(23위),대남사업 담당 비서겸 「조평통」 부위원장 윤기복(24위),부총리 김달현(32위) 등보다 고위급 인사로 확인됐다.
◇잠입·탈출=이선실은 75년 2차 남파활동후 복귀한뒤 일본에 파견되어 수년간 해외를 통한 침투공작을 지휘해오다 78년 6월부터 79년 9월까지 북송된 것으로 알려진 신순녀(74·전북 완주출생)라는 이름을 도용,조통련 모국방문단 일원을 가장해 자연스레 귀국 기회를 마련했다.
이어 80년 3월 영주귀국 형식으로 국내에 잠입,전주시 평화동 사무소에서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합법적 활동 근거를 마련한 이선실은 같은해 5월 상경,서울 신월동·신길동·대방동 등지에 마련한 아지트를 전전하며 북한 공작원들과 10여년간 활동하면서 간첩망을 총지휘했다.
이선실은 90년 10월17일 황인오씨를 포섭,강화도에서 고무보트편으로 해주 해안에 도착한뒤 헬기편으로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 부장(장관급) 이창선·「조평통」 부위원장 등 고위급인사의 환영을 받았다.
◇활동=이선실은 「신순녀」 「이선화」 「이옥녀」란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90년 7월16일자 민중당보 2호에 「제주지역 발기인 이선화」라는 이름으로 『민중시대를 맞는다』는 제목의 축시를 게재하는 등 활동으로 11월10일 민주당 창당대회때엔 창당 유공자가 되기도 했다. 이선실은 대남공작활동중이던 80년 10월 북한에서 「당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된후 82년 2월·86년 10월·90년 4월 잇따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됐으나 한반도 행적이나 모습이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반드시 참석해야할 행사에도 일절 나타나지 않다가 북한으로 복귀한 후인 91년 1월 김일성이 윤이상씨 등을 접견할때 배석한 사실이 처음 확인됐을만큼 「숨겨진 인물」이었다.<권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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