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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동무만 해줘도 환한 미소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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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09면

대전성모병원 호스피스에서 강은지 인턴기자(왼쪽)가 비닐 온수 백을 들고 자원봉사자들이 환자의 머리 감기는 작업을 돕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의 하루는 어떻게 돌아갈까. 일부에 알려진 대로 ‘죽으러 가는 곳’은 아닐까. 대학생 인턴기자가 1월 15~19일 대전성모병원에서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체험했다. 원래 자원봉사를 하려면 면담과 4주간의 수습을 거쳐야 하지만 담당 수녀의 양해를 구해 간단한 교육만 받았다. 대전성모병원은 5층을 호스피스 병동으로 꾸며 22병상과 2개의 임종실을 갖추고 있다. 체험기간 입원환자는 14명이었다.

대학생 인턴기자가 본 ‘시한부 삶’

첫째 날, 환자에 가까이 가기
병동에 들어서자 복도에 꾸며진 인조정원과 곳곳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병동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민승희 수간호사는 “환자와 가족들이 이곳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배려했다”고 말했다. 어떤 환자는 휠체어를 타고 인조정원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일부 환자는 책을 보기도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자원봉사자의 하루는 환자들의 명단을 체크하는 일로 시작한다. 목욕이 필요한 환자가 누구인지, 어떤 환자가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지 등을 함께 점검한다. 4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침상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환자들의 다리를 살살 쓸어주거나 기도를 해준다. 한 환자가 “힘들다”고 고통을 토로한다. 자원봉사자는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한다. 기자는 이날 봉사자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했다.

둘째 날, 머리 감기기
본격적인 봉사에 들어갔다. 전립선암 환자인 이모(54)씨의 머리 감기기로 시작했다. 환자가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침대에서 머리를 감겨야 한다. 이동용 온수 백과 물받이가 들어온다. 기자는 물통의 물 양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고 자원봉사자 김춘원(61ㆍ여)ㆍ이일선(58·여)씨가 머리를 감겼다. 이어 유방암 환자 이모(60ㆍ여)씨의 머리도 감겼다. 그녀는 가녀린 목소리로 “고마워요”라고 말한다. 그 인사를 하기가 영 쑥스러운가보다.
오후는 웃음치료 시간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환자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웃음치료나 미술치료와 같은 특수치료를 한다. 먼저 자원봉사자들은 환자들이 침대에 앉도록 도운 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기자도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웃으며 환자들의 웃음을 유도했다. 후두암 환자 김모(66ㆍ여)씨가 연방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는다. 이 순간만은 말기암 환자들의 육체적 고통은 온데간데없다.

셋째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환자 가족 불화 해결에 나섰다. “왜 빨리 안 데려가는지 몰라, 아이고.” 이모(65ㆍ여)씨가 큰 소리로 불평한다. 위암으로 투병 중인 남편과 관계가 좋지 않다. 이씨에겐 암에 걸리기 전에 폭음하고 폭력을 휘두른 남편이 밉기만 하다.
자원봉사자 임정희(66ㆍ여)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남편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라고 조언했다. 임씨는 “대부분의 환자는 가족과 갈등이 있지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용서하고 사랑을 고백하면 남은 삶이 더 행복해지고 홀가분해진다”고 말했다.

넷째 날, 죽음에 대한 생각 바꾸기
말기 유방암 환자 김모(48ㆍ여)씨. 김씨는 이날 오전 암 진단 이후 자신의 삶의 변화과정을 들려줬다. 국립암센터에서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젊은 나이에 왜 자신한테 이런 시련이 왔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남편이 간병하러 왔을 때도 “보기 싫다”며 돌려보낼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암센터에서 호스피스를 권했고 여기에서 보름 정도 보내면서 달라졌다. 아침ㆍ점심 때 구내방송에서 나오는 ‘오늘의 말씀’과 기도, 오전 미사 등 종교활동이 마음을 서서히 안정시켰다. 김씨는 “자원봉사자가 친구처럼 내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기도해주고, 그들에게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보니 달라지더라”고 말했다. 대화가 끝나자 자원봉사자들은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했다. 김씨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후 미술치료 시간 때는 현직 미술 교사의 지도로 지점토 꽃을 만들었다. 김씨는 보라색 칸나를 만들어 같은 병실의 환자에게 선물했다. 문병 온 동서들과 수다를 떨었다. 박박 민 머리가 아니면 말기암 환자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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