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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의톡톡히어로] 눈물 마셔 주려 존재하는 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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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눈물을 마시는 새요."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글을 두드리는 '타자'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판타지 소설가 이영도가 지금껏 발표한 이야기들은 드래곤과 엘프, 마법과 모험, 도깨비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도시가 등장하는 명명백백한 판타지다. 이 때문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의 힘으로 묶어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판타지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그의 장기가 발휘되는 것은 서로 다른 존재들의 관계맺음에 대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지성을 가진 종족들 사이에서 관계 맺음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 '왕'에 대한 그의 상상력은 처녀작인 '드래곤 라자'에서 출발하여 왕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다룬 '눈물을 마시는 새'(황금가지)를 통해 특히 큰 꽃을 피웠고, 최근작인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왕이 인간들에게 주려 했던 '영원히 죽지 않는 황제'라는 이름의 신에 대한 이야기까지 뻗어나갔다.

현실을 사는 우리들 역시 '왕'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이 다르고, 의미가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한 집단을 대표하는 이름으로서의 '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드래곤 라자'에는 양녕대군을 연상시키는 폐태자 길시언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그의 행적을 지켜본 화자를 통해 '왕은, 내가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왕의 의미는 한층 시적인 색채를 띤다. 위기에 처한 집단의 모든 증오와 다툼을 한 몸에 대신 받아주는, 그래서 가장 빨리 죽으며,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눈물을 마시는 새, 왕. 인간들 앞에 새로운 왕으로 우뚝 선 것은 제 목숨을 바쳐 동생을 살리기 위해 적들의 나라까지 험난한 여행을 해온 '사모 페이'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적들의 나라에서, 적대자인 다른 종족들의 눈물을 대신 마셔주는 존재, 왕이 된다.

왕이 먼저 있고, 피지배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왕,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을 대신 마셔주는 희생양으로서의 왕은, 인문학적 상상의 공간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개념일까? 아니면, 이 복잡한 세상의 왕은 눈물이 아니라 다른 것을 마시는 새로 태어나는 것일까? 판타지는 분명히 알쏭달쏭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이야기지만, 현실은 그것보다도 훨씬 요상한 환상인 듯하다.

진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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