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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범표」신발(지방패트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주)삼화 범일공장 경영난으로 문닫아/66년 국산운동화 해외에 첫 수출 “기염”
경영난으로 15일 61년의 역사에 막을 내린 부산시 범천2동 1290 (주)삼화 범일공장의 폐쇄는 「범표」신발을 기억하는 부산시민들은 물론 주로 50대 이상의 「범표신발세대」들에게도 아쉬움을 남겼다. 한때 부산경제계를 주름잡았던 고 김지태씨가 해방후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해 성장을 거듭하면서 60,70년대 한국의 신발산업을 선도해온 삼화 범일공장은 70년대 후반 무리한 시설확장과 해외투자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부실채권으로 경영이 악화되면서 79년부터 은행관리를 받기 시작,고전을 면치 못하다 결국 폐쇄의 비운을 맞은 것이다.
삼화 범일공장이 신발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인 31년부터.
소자본과 단순한 기술만으로 생산이 가능해 너도나도 신발공장을 세웠던 때인 31년 10월 일본인이 현재의 위치에 설립,고무신을 만들던 공장을 포함,34년 11월 부산 환대고무공업사 미창청삼랑사장이 당시 일본재벌인 삼정물산의 후원을 받아 부산의 13개 신발회사를 합병해 만든 삼화호모가 그 전신이다.
해방때까지 연간 3만4천켤레의 고무신을 생산,국내에서 두번째로 큰 신발회사였던 삼화호모는 해방이후 적산공장으로 소유권이 정부로 넘어간 가운데 종업원들이 경영을 맡아오다 52년 변정규씨에게 불하돼 연간 5백40만켤레의 생산규모로 성장했으며 58년 당시 부산의 대표적인 상공인이던 김지태씨가 인수했다.
46년부터 6년간 부산상공회의소의 초대 및 2대 회두(회장)을 역임하고 제2,3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부산직할시 승격운동,국제신보 창간,부산일보 인수 운영,부산문화방송 운영과 한국문화방송 설립 등 정치·문화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김씨가 이 공장을 인수하면서 삼화는 「범표」신발을 만드는 한국의 대표적 신발회사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66년 미국에 운동화 2만8천1백11달러어치를 수출,국내 최초의 신발수출회사가 된 삼화는 70년대들면서 가죽신발 제조기계를 도입하고 생산라인을 30개로 대폭 증설,종업원 1만여명의 대기업으로 성장,국제상사와 함께 한국의 신발산업을 선도했다. 72년 6월 김씨의 셋째 아들 김영주씨가 경영을 맡은 삼화는 76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정책에 따라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아 77년 수출 1억달러 달성,78년 수출 2억달러 달성 등 신발수출을 선도했다. 이어 78년말에는 또 필리핀에 3개의 신발공장을 설립,국내 신발회사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그러나 76년 미국수출을 위해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설립한 현지법인에서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1천억원의 은행빚을 지면서 기울기 시작한 삼화는 79년 은행관리로 넘어갔고 5공이 들어서면서 김지태씨가 문화방송 등을 내놓을때 종합상사지정을 반납하는 등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85년에는 3저현상에 힘입어 한때 활기를 되찾기도 했으나 이후 주문량 감소,인건비 상승 등 계속된 신발경기 침체로 극심한 경영난을 겪어오다 지난해 여름 태풍 글래디스때 부산 금사공장이 침수,1백억원의 피해를 본 뒤로는 각종 자구노력도 실패,범일공장의 문을 닫은 것이다.<김관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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