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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을] 목숨 구한 냉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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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이북 출신이시다. 1948년 온 가족을 북에 두고 삼팔선을 넘으셨다. 당시 청년이던 아버지는 공산 체제에 대한 비판을 일삼다 체포를 당할 지경에 처했다. 다행히 미리 사실을 안 할아버지께서 급하게 돈을 준비해 아버지가 삼팔선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안내인을 붙여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밤중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곧 돌아올 수 있으리란 생각에 식구들 사진 한 장 챙기지 않은 채였다.

가다 보니 안내인의 뒤를 따라붙은 것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에겐 "아드님 한 사람만 안내하겠다"고 해놓고는 십수 명에게 돈을 받고 무더기 탈주를 감행한 것이었다. 그렇게 삼팔선 인근 산골에 다다랐을 때 아버지는 냉면집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도망이고 뭐고, 그 냉면이 너무 먹고 싶어 참을 수가 없더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혼자 뒤처져 웬 노파가 만들어 파는 냉면을 세 그릇이나 시켜 먹었다고 한다. 한데 그 맛이 살아생전 다시는 경험 못 할 천상의 맛이었다나.

더 먹고 싶었지만 안내자며 다른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자 아버지는 불안한 마음에 죽을힘을 다해 뒤를 쫓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산속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은 앞서가던 그 많은 사람의 시신이었다고 한다. 몰래 뒤쫓아온 추격대에 몰살을 당한 것이었다. 공포감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울음을 터뜨렸고 천신만고 끝에 혼자 달랑 살아남은 안내자를 만나 겨우 남쪽으로 넘어오셨다고 한다.

그때 일 때문일까, 아버지는 냉면을 끔찍이 좋아해 어디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하면 지방행도 마다 않으셨다. 하지만 그 냉면 맛은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친정 식구들과 강원도 오대산에 여행을 갔는데, 진부에 도착해 잠시 차를 세우고 볼일을 보는 사이 아버지가 없어지셨다. 온 식구가 나서 찾아 헤매는 와중에 아버지가 이를 쑤시며 나오신 곳은 한 허름한 냉면집이었다. 아버지는 "냉면 간판만 보면 어떤 맛일까 궁금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제 다시 냉면철, 아버지가 유난히 더 보고 싶다.

최금숙 (53.주부.동작구 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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