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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사회」를 사는 지혜(정년을 이긴다: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러시아/뛰는 물가에 빛바랜 연금/퇴직 후도 일자리 가져야 생활비 충당/노후건강은 “응급지원” 구급차가 맡아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CIS)의 사회보장 제도와 노인복지는 과거 이 나라가 사회주의를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설정했던 까닭으로 이론적으로는 거의 완벽하다.
노령층이라 할 수 있는 50대의 남녀들은 대부분 연금혜택을 받고 있으며 의료혜택·휴양시설의 이용 등에 있어서도 특별히 국가의 보조를 받는다.
모스크바시를 다니다 보면 특별히 눈에 많이 띄는 차가 있다.
「03」이라고 붉은 글자로 쓴 「스코라야 포모슈」(응급지원) 소속의 구급차들이다.
○이론상으론 완벽
이 차들은 거미줄처럼 쪼개진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정해진 순서대로 대상지역의 연금생활자들을 방문,그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한다.
5일 크라스노 그바르디야지구에서 만난 「스코라야 포모슈」소속의 보리스씨(29)는 『오레호보·차리치노·칸테미로프스카야 마을의 연금생활 노인들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순회진료를 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러시아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연금생활자인 퇴역노인들을 대상으로 거주지 관할 종합병원에서 순회진료를 하고 있다.
또한 연고권자가 없거나 간병인들이 없는 연금생활자들은 「노인의 집」이라는 사회보호시설에 거주하도록 하는 등 어떻게 보면 구미 선진복지사회 보다도 제도상으로는 완벽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연금제도의 운용도 일찍부터 체계화 돼 과거에 정상적인 노동활동을 한 사람이라면 노후에 생활비를 충당할만큼 연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국가제도가 완비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면서 인간이 겪게 되는 거의 모든 인간사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보조하는 철저한 국가봉사 체제가 확립됐던 곳이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국가들이었다.
학교교육을 마친후 직장을 알선해주는 것도 국가였으며 심지어는 생을 마친 사람에게까지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이념으로 장례지원을 하는 등 거의 완벽한 국가보조 시스팀이 존재했었다.
국가가 묘지는 물론 운구·입관 등의 모든 절차를 철저하게 사회의 일로 간주해 국가기관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팀은 과거에도 상당부분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의의」가 강했으며 소련이 몰락한 현재 제도의 운용에 있어 재정의 삭감 등 현실적인 장애요인의 발생으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장례비용 등이 턱없이 높아지고 있어 유족들의 슬픔을 배가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장례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종합병원의 영안실에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의료보호와 보조의 경우도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박봉과 시설 및 기자재·의료용품 부족 등의 이유로 「돈」이 없으면 혜택을 보기가 어려운 쪽으로 사정이 바뀌고 있다.
물론 사회보장제도의 사실상 운용이 이론과 달랐던 문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소련의 몰락과 함께 불어닥친 자본주의화의 물결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과거 국가사회주의시절 국가가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보조해주던 각종 제도들이 이제는 재정적자 축소책과 맞물리면서 없어지거나 기능이 축소되고 있다.
그런면에서 러시아 복지제도의 변천과 기능의 사멸은 국가경제력이 쇠퇴해 가면서 나타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분야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러시아의 경우 법에 의하면 남자의 경우 60세,여자의 경우 55세가 되면 연금을 받도록 되어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는 총 근로경력이 25년,여자의 경우는 20년이 넘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극한지라든가 특수한 직종에 근무했던 사람들,전쟁에 참가한 경우엔 특별한 예외를 두고있다.
예를 들면 5명 이상의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는 여자의 경우는 총 근로경력이 15년만 되어도 50세부터 연금생활을 할 수 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경우 아프가니스탄 근무 1년을 3년으로 환산해준 것이라든지 북극지방이나 남극지방 등 극지방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이 지역 근무기간을 2배로 환산해준 것 등도 그런 예다.
물론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노동활동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연금생활을 하면서도 노동활동을 계속 하는게 요즘의 보편적 현상이며 이렇게 해야만 연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생활고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두가지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인플레의 기승으로 연금만으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보장 옛 얘기
러시아의 연금제도는 지난 90년 12월31일로 변화를 겪었다.
최고회의(의회)가 연금의 산정과 지급기준을 총불입기간 개념에서 인플레 등을 모두 감안한 실질 불입액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연금생활에 들어가기전 5년의 기간중 본인이 선택한 24주간의 총수입을 24로 나누거나 아니면 연금생활에 들어가기전 60주일의 총소득을 60으로 나눈 금액을 지급했으나 이것이 연금 불입기간중 인플레 등과 연동되면서 지급액이 사실상 감소돼 이 법 발효후 연금지급을 받기 시작한 연금생활자들의 불만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에서 연금활동을 하고 있는 인구의 총수는 대략 총인구의 18%선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는 그런대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나 소련의 해체에 뒤이은 제도개혁으로 말미암아 초 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생활의 어려움은 말이 아니다.
루블화의 가치하락과 국가통제하에 있었던 생필품 가격자유화,공공요금인상,펜시보나트(휴양소) 등 휴게시설 이용료의 엄청난 상승은 연금의 효용을 사실상 상당부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러시아 정부가 정한 최저연금은 9백루블,중간수준의 연금액은 1천3백루블.
그러나 최근 러시아 통계당국이 폭등한 물가를 감안해 제시한 1인당 필요한 월평균 생활비는 2천5백60루블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노령인구층은 어떤 방식으로 생활하고,또 연금의 부족분을 메우는가.
나제즈다 알레산드로브나씨(70·여)는 20년을 식당에서 일하고 지난 70년초부터 연금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그녀가 받는 연금은 9백루블,한달 생활비에 턱없이 모자란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아 대학교 기숙사에서 당직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이틀에 한번꼴로 근무하면서 그녀가 받는 월급은 1천1백루블.
빠듯하지만 이 돈으로 그녀는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연금생활자들이 갖는 보조적인 직업은 다양하다.
도서관 사서,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감시원,식당 접시닦이 등이 대표적인 일들로 이들은 이러한 일을 해 평균 4백80루블에서 1천1백루블까지 월급으로 받아 연금의 부족분을 메운다.
그러나 직업을 갖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다차」라고 불리는 도시근교의 별장에서 꽃·야채·과일 등을 재배,지하철역 등에서 직접 판매해 생활비에 보탠다.
마리야 세묘노바씨(58·여)는 여름이면 보통 약 6주동안 다 차에서 지낸다.
이곳에서 꽃·양배추 등을 재배해 가까운 메트로(지하철) 시장에 내다 판다.
그녀의 아들이 1주일에 한두번씩 자동차로 데려다주는 「유고 자파드나야」역에서 꽃 등을 판매해 버는 수입은 한달에 약 1천9백루블 정도. 그러나 겨울에는 할일도,재배할 농작물도 없어 몹시 무료하고 우울하다.
연금만으로 살기 위해선 아침 일찍부터 국영상점에 나가 싼값으로 물건을 사기 위해 우보슈카(장바구니)를 들고 긴줄을 늘어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만 해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표트르씨(70)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시 중심가로 향한다.
○불안한 공공요금
다차에 딸린 텃밭에서 농작물을 재배할 수도 없고 특별한 직업도 없어 매일같이 시내를 돌며 빈병을 수집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한다.
빈병 하나에 3∼5루블을 받을 수 있는데 하루를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대충 15개 정도는 수집한다.
이렇게 해서 표트르씨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많을 때는 월 1천5백루블 정도.
그러나 그의 생활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현재 12평의 조그마한 방에서 다른 두가족과 함께 사는 그는 항상 『돈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중얼거린다.
이들 연금생활자들은 버스나 지하철 요금이 오를 것이란 소문이 들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고 한다.
이미 빵 한조각에 12루블,고기 1㎏에 1백루블,치즈 1㎏에 1백80루블,설탕 1㎏에 70루블씩 하는데 또 물건값이 오르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러시아의 연금생활자들은 매일같이 폭등하는 물가속에서 과거 사회주의 체제때 확립된 복지혜택을 명목상으로 누리면서 살고있다.
그러면서 그들끼리 만나면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뇌까린다고 한다. 『그래도 과거엔 배가 고플 걱정은 없었다』고. <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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