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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터뷰] 유지연 “‘요즘 어디 나와요?’ 질문 받을 때 가슴 아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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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연(再演) 배우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28일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자기 집 뒤뜰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낯익은 얼굴이다. 하지만 '여재구'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죽음은 하루 종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그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연예인이란 말인가.

이름하여 재연 배우. 재연 드라마에서 스타 못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지만 결코 스타가 될 수는 없는 사람. 유지연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울대 졸업 후 KBS 18기 공채 탤런트로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본의 아니게 재연 배우로 알려졌다. 유지연은 2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고단한 이 직업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송사 공채 탤런트가 어쩌다 '재연 배우'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는지 묻자"정말 고민스럽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다행히 최근 각종 프로그램의 리포터와 게스트로 활약하면서 힘겹게 재연 배우에서 벗어나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여재구라는 재연 배우가 자살했다.

"그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도 유지연씨는 잘나가는 편 아닌가.

"지금도 너무 힘들다. 간간이 맡는 단역으로 연명한다. 연속극을 하면 형편이 좀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생활이 안 된다."

-경제적으로 힘드나.

"용돈을 받아쓸 형편이나 나이도 아니고 수입도 일정치 않다. 일이 없을 때에는 옷이나 액세서리도 못 사고 밥도 주로 집에서 먹는다. 이름만 화려한 연예인이지 수입은 형편없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재연 배우들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등 투잡스족이 많다. 남자들은 거의 맞벌이를 한다. 유명 연예인이 아니라서 협찬을 받지 못해, 화장하고 머리 손질하는 데도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옷값도 만만치 않다. '사랑과 전쟁'에서 사치스러운 여자 역을 주로 맡았는데 동대문에서 배역에 맡는 화려한 옷을 구입하느라 고생했다. 한 회당 옷이 20벌 정도 필요해서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일하는 데도 돈이 이렇게 많이 드는데, 돈 들어가는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수없이 많이 했다. '왜 (방송에) 안 나와요?''요즘 어디 나와요?'이런 질문 받을 때 정말이지 죽고 싶다. 싫어서 안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질문을 받으면 가슴이 아프다. 계획대로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힘들다. 특히 재연 배우들은 말 그대로 '파리 목숨'이다. 돈도 못 버는데 외모 때문에 지적당하고, 늙어간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비참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연예기획사에 들어가면 되지 않나.

"'사랑과 전쟁'을 찍으면서 굳어진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인지 웬만한 기획사에서는 나를 받으려하지 않는다. 개인 매니저나 코디네이터를 둘까 생각도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추운 겨울에 무거운 옷 여러 벌을 드느라 대본 잡을 손이 없어 끙끙거릴 때는 정말 서러움이 밀려온다."

-재연 배우들은 왜 정식 드라마에는 출연하지 못하나.

"캐스팅을 하는 분들이 '재연 배우는 배우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재연 드라마에 출연하고 나면 연기자로서 급이 낮아진다고들 말한다. 일종의 편견이다. 나는 '재연 배우'라는 명칭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날더러 '재연 배우'라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왠지 위축되는 느낌이다. '비중 있는 조연'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것 같다."

-출연료는 얼마나 되나.

"스타급 연기자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보통 등급제로 출연료가 결정되는데 1 ̄18등급으로 나뉜다. 1 ̄5등급은 아역 탤런트들이고 일반인 연기자는 6등급부터 시작한다. '사랑과 전쟁'에 출연할 당시 나는 데뷔 8년차로, 9등급이었다. 적은 수입 때문에 서민적인 생활도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회당 1 ̄20만 원을 받는 재연 배우들의 경우 등급이 아예 없다."

-그래도 연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데뷔 초에는 열정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연기자가 되는 것만 생각했다. 그 꿈과 목표 이외에는 생각해본 일이 없어서 지금 와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연기만 했기 때문에 전공을 살릴 기회가 없었다."

-서울대에서 국악을 전공했다던데.

"학교 때문에 아무거나 하지도 못한다. 얼마전 한 드라마에서 가야금을 타는 술집 여자 역이 들어왔는데 할 수가 없었다. '서울대에서 국악 전공해서 고작 그거 하냐'는 말 듣기는 싫었다. 동기나 선후배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내 출신학교를 몰랐으면 좋겠다."

-같은 학교 출신 김태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다시 태어나고 싶다. 연기자로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고 싶다. 나는 톱스타도 아닌데 얼굴만 많이 알려져서 후회가 된다. 재연 배우들은 이래서 괴롭다. 비중있는 조역을 맡으면서 이미지를 새로 쌓아가고 싶다. 그러면 배우로 재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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