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재제한 접고 ‘국민 알권리’ 인프라 갖춰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호 06면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36대 미국 대통령(1963~69)인 린든 존슨은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표방하며 진보적으로 사회·교육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가 취했던 교육ㆍ빈곤 정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언론사(史)에도 큰 자취를 남긴다. 66년 ‘정보자유법’을 제정한 것이다. ‘누구나 필요한 국가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사회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다.

盧정부, 美 존슨 대통령 ‘위대한 사회’서 배워라 #진보적 존슨 정부, 정보자유법 만들어 ‘열린사회’ 앞장 #‘참여정부’는 기자실 통폐합 등 공직사회 차단 열 올려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고 정부기관은 국민의 정보제공 요구에 응해야 한다. 이를 거부하는 공직자는 연방법원의 판결을 통해 처벌받을 수 있다. 중앙정보국(CIA)ㆍ연방수사국(FBI) 등이 공개를 거부해 종종 논란이 있지만 법 제정 이후 40년이 지나면서 미국 관공서에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국가 정보가 쌓이게 됐다.

워싱턴에는 정부 공개 자료를 수집하거나 정보공개를 수시로 청구해 수준 높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은 단체가 한두 곳이 아니다. 저널리즘스쿨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관공서 창구에서 정보공개를 청구해 보는 실습을 한다. 공개자료를 활용해 연구도, 보도도 하는 것이다.

이규연 기자

노무현 정부의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보며 존슨이 떠오른 것은 같은 진보 성격의 정권이지만 가는 길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 정보를 최대한 공개해 열린 사회를 만들겠다는 존슨, 그리고 기사송고실을 통폐합하고 언론의 공직자 대면 접촉을 제한해 ‘선진화’(?)를 꿈꾸는 현 정부. 며칠 전 소설가 김훈이 KBS PD와 인터뷰하는 걸 봤다.

“정부 언론조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PD)
“(퉁명스럽고 짤막하게) 왜 하는지 모르겠어.”(김훈)
그의 말에 동의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정부가 설명하긴 했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국가기관을 투명하게 해 ‘위대한 사회’로 간다는 건 말이 되는데, 취재 환경을 힘들게 하는 게 선진화라니, 여당 이름도 ‘열린우리당’으로 지었던 정권이 국민과 그들의 알 권리를 대변하는 기자 사이를 벌리는 방식으로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니….

김대중 정부 때 정보자유법의 아류인 행정정보공개법이 만들어졌다. 정보공개 청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느낄 것이다, 제대로 된 정보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공개 대상 정보가 턱없이 적고 부실하다. 민감한 정보의 공개는 거절당하기 일쑤인 데다가 비공개 사유도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 데이터의 원자료 역시 구하기 어렵다. 일선 공무원이 고의적으로 공개를 거부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해외연수를 떠난 공무원 숫자를 물어봤더니, 해당 조직 직원은 공보 조직에 넘기고, 공보 조직은 나중에 전화를 주겠다고 한 뒤 열흘이 넘어도 연락이 없고…. 알아보니 홈페이지에 떠 있는 정보더라고요.”(본지 강민석 기자)

“산업자원부 산하기관에 전화를 걸어 기관의 임원 명단과 경력 자료를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담당 직원이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있으니 공개할 수 없다’고 거부하더군요. ‘명단ㆍ경력을 알려주는데 무슨 사생활 침해냐’고 다시 요구하니까 뒤늦게 자료가 오더군요. 기가 막힌 게 보내온 자료에 주민번호가 적혀 있었어요.”(중앙일보 강승민 기자)

“대통령 직속ㆍ자문 위원회의 명단ㆍ직책ㆍ급여 등의 정보공개를 청구했어요. 이런저런 이유를 대다가 정작 자료가 온 건, 달력이 한 장 넘어간 뒤였어요.”(경향신문 김종목 기자)

기자가 이 정도인데 일반 시민은 어떨까. 정부는 기자실ㆍ기자단이 없는 유럽이 선진적인 양 선전한다. 하지만 취재 양식은 나라에 따라 매우 다르다. 그 사회의 독특한 역사ㆍ대중의식 등이 투영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럽에도 기자클럽의 문화가 있고 우리의 독재 시절처럼 언론인에게 노골적으로 특혜를 주는 나라까지 있다.

숭실대 김사승(언론학) 교수는 “저널리즘은 정치ㆍ경제ㆍ행정 같은 제도의 틀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진다”며 “기자실ㆍ기자단 유무로 선진 여부를 따지는 것은 지극히 파편적이고 단순한 사고”라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기자실ㆍ기자단 운영은 전체 저널리즘 과정 중 극히 일부인데 왜 정권 차원에서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의 기자실ㆍ기자단 문화는 구한말 일본 언론사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한 정부 홍보 관계자는 “기자실은 일제의 잔재’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실제 운영 방식은 다른 점이 많다. 1993년 일본 도쿄의 경찰기자(사쓰마와리) 취재시스템을 본 적이 있다. 일선 경찰서에 기자실이 없는 대신 경시청(우리의 서울경찰청)에는 언론사당 열 명 정도가 머물 수 있는 큼지막한 기자실이 있었다. 기자실 스피커는 치안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견학 당시 “신주쿠에서 총격 발생”이라는 상황이 들어오자 곧바로 신참 기자들이 출동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에는 몇몇 일선 경찰서에 기자실이 있지만 서울경찰청 기자실에는 언론사별로 한 명만 출입하고 치안 상황은 실시간 공개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부 기자가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를 담합한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의 입에선 “출입처 중심주의 관행이 획일적인 기사를 양산하고 기획ㆍ연구 기사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말도 나왔다.

11년 전 필자는 서울경찰청 출입기자(시경캡)였다. 고백하건대 당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다른 기자들과 입을 맞추며 작은 위세를 부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언론사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옛날이야기가 됐다. 매일매일 취재에 바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요즘 기자의 현실이다. 신문과 방송이 서로 공격하고, 신문사끼리 싸우는 세상에 우려할 만한 담합이 쉽게 벌어지겠나.

최근 3년 새 전국적으로 10여 개 언론사에 기획ㆍ탐사 취재 조직이 생겨난 것은 출입처 중심주의를 보완하려는 언론계의 고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자실에 앉아 왜곡된 기사를 송고하는 기자가 지금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이를 제재하는 건 해당 언론사 에디터ㆍ데스크의 역할이다. 형편 없는 기사를 내보내면 독자·시청자가 가만 있겠나. 적어도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나서 걱정해줄 사안은 아니다.

노 정부는 존슨의 ‘위대한 사회’론(論)에서 분명 배울 게 있다. 이번 기회에 ‘국민 알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할 인프라를 깔자. 마침 정부도 정보공개 제도를 손질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참여정부’‘열린우리당’의 사전적 의미에도 맞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