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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인터넷 없이 자연과 함께 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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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06면

충북 제천군 봉양읍. 택시가 2대만 있는 작은 마을이다. 지난달 25일 양조장에서 그중 한 대를 불렀다. 주위에는 온통 논과 밭뿐이다. 비포장도로를 5km 정도 달렸을까. 허름한 회색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폐교로 버려졌던 애물단지 건물. 하지만 이젠 서울·하남·인천·대전·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온 53명의 아이들로 북적거린다. 주변에 민가가 드물고 오가는 사람도 없다.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돼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인터넷도 끊고 산다. 교사 숙소를 제외하면 TV도 없다. 그래서 유행과 담 쌓고 산다. 복도에 공중전화 한 대만 달랑 놓여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다. 제천 꽃피는학교는 산속의 외로운 섬과 같았다.

전원에 묻힌 제천 꽃피는학교

제천 꽃피는학교 학생들이 이달 초 동해시 삼화사에서 산사 체험을 하던 중 이른 아침에 절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숲속을 거닐고 있다. 동해=최승식 기자

“서울에서는 박물관에서야 볼 수 있는 곤충들이 주변에 널려 있어요. 지난 1년간 딱정벌레를 봤는데 너무너무 좋았어요.”

서울 대치동 출신인 김영민(14·중2)군은 도시가 싫어 1년 전 이 학교로 왔다. 스스로 이 학교를 찾아냈고 부모님의 동의를 받았다. 김군은 “꽉 막힌 도심이 너무 싫었는데 자연을 벗 삼아 직접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김군은 여기에 와서 파브르와 같은 세계적인 곤충학자의 꿈을 키우고 있다.
 
톨스토이 읽기
이 학교의 하루는 오전 6시30분에 시작된다. 학교 뒷동산인 ‘해내림산’을 한 시간 동안 산책한다. 한 명도 빠지지 않는다. 8시50분부터 한 시간 동안 합창·합주·한자·경전읽기를 골고루 배운다. 경전은 동서양의 고전을 교재로 사용하는데 이날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공부했다.

다음에는 이 학교의 자랑거리인 통전(通全) 수업이다. 일종의 여러 교과목 통합 수업인데 예를 들면 찰흙으로 조각품을 만들면서 무에서 유의 창조, 지구의 탄생 등을 함께 배운다. 수업시간 끝 무렵에는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고 꿈을 노트에 그려본다. 미술·과학·철학을 동시에 배우는 것이다. 정태림(39·여) 교사는 “통전 수업을 통해 사물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눈을 키우게 된다”고 말했다.

국·영·수에도 시간을 꽤 할애하지만 방식이 다르다. 가령 영어는 성경을 교재로 쓰고, 교사가 자신의 미국 생활 경험담을 얘기하고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스스로 만드는 교과서
“찾았다. 3번이 뚜껑 없는 상자예요.”
이날 낮 12시. 6학년생 12명이 교실에 빙 둘러앉아 모눈종이 오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 학생들은 일반학교 기준으로 하면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여기서는 중학교 1학년으로 분류된다. 가위·풀·자·크레파스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미술시간처럼 보이지만 ‘뚜껑 없는 상자 예상하기’란 수학 시간이다. 모눈종이를 접어 뚜껑 없는 박스를 만들어 노트에 붙인다. 이 과정에서 전개도의 개념을 알게 되고 실생활에 어떻게 활용할지 배우게 된다.

부산에서 온 김용훈(13)군은 “직접 오려서 접어보니 삼각·사각뿐 아니라 어떤 모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연필꽂이 만들 때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과목마다 이렇게 만든 노트가 교과서가 된다. 일반학교처럼 정해진 교과서가 없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오리고 붙이고, 필기하고 이렇게 해서 한 권의 노트가 만들어지면 그게 교과서다.

텃밭을 가꾸는 노작(勞作) 수업도 중요한 과목이다. 학생 한 사람이 한 종류의 작물을 기른다. 수세미·고추·상추·호박 등을 기르고 이를 통해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옆 마을의 독거노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제천 꽃피는학교는 인가를 받지 않은 중학교 과정의 대안학교다.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검정고시를 따로 치러야 한다. 지난해 생겼기 때문에 8학년생(중3)이 최고 학년이다.

야외 활동이 많기 때문에 비활동적인 학생 은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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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가 전원형 중등학교는

미인가 전원형 중등학교에는 간디자유학교(경북 군위), 간디학교(충북 제천), 실상사 작은학교(전북 남원), 마리학교(인천시 강화), 산돌학교(경기도 남양주) 등이 있다. 주로 생태·평화·인권·자유·평등·공동체의식 등과 관련한 교과과정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

간디자유학교(고등학교)는 학생의 개성과 소질을 최대한 중시해 맞춤식으로 수업한다. 이 때문에 전체를 위한 수업시간표는 있지만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개별학습이나 그룹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 다른 대안학교처럼 3학기나 4학기에 해외 탐방을 간다. 제천 간디학교는 경남 산청에서 중·고 통합과정으로 운영되다가 2002년 9월 중학과정만 지금의 제천으로 옮겼다. 농사·요리 같은 자립교육과 정서교육,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감성교육을 중시하고 견학과 체험학습을 많이 한다.

실상사 작은학교는 불교계에서 처음 만든 대안학교다. 불교의 철학과 문학을 가르친다. 지리산 천왕봉이 보일 정도로 자연환경이 우수하며 지역과 연계해 공동체를 추구한다. 마을 집을 빌려 교사 1명과 학생 3~7명이 한집에서 기거한다. 산돌학교는 기독교 학교이지만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 음식을 금지한다. 마리학교는 ‘생명이 곧 하늘’이라는 교육이념을 갖고 있다.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나 서민층 자녀의 입학을 장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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