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88화 형장의 빛(24)망부20년 물거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지리산 빨찌산 부대 문화부 대장 나륜주씨(현재64세).그를 처음 만난 것은 60년대 말 대구교도소에서였다. 그는 무기수로 갇혀 살면서 부처님 뜻에 귀의, 불교반장을 맡고 있었다. 국민학교 교사였던 그가 빨찌 산이 되어야 했던 비극은 6·25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함평군의 시골 국민학교 교사였던 나씨는 이웃에 사는 정복희씨(현재63세)와 중매결혼을 했다. 두 아들이 태어나 나씨의 집에서는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결혼한 지 5년 되던 해 6·25가 터졌다.
노령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조용한 촌에도 포성과 총성이 가까워져왔고, 급기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남로당 지하조직과 이에 동조하는 무리들에게 가족들이 잡혀 남자들은 온갖 위협과 회유에 밤낮없이 시달렸다. 나씨와 그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고통도 심했지만 가족들을 해친다는 위협에 「빨갱이」가 될 것을 서약했다.
후퇴했던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자「빨갱이」들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 공비가 되었다. 나씨 부자도 인근 대청산의 공비로 변신했다.
이것이 화근이 돼 가까운 직계가족 11명이 빨갱이로 몰려 국군의 손에 살해됐다.
나씨의 부인 정씨는 어린 두 아들과 함께 고향에서 쫓겨 나와 문둥이 촌에서 살게 되었다. 성치 않은 사람들에게 사람대접 받는 것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떡판을 이고 떡 장사를 하거나 함평·영광을 다니며 포목장사를 해 끼니걱정은 덜게 되었다.
한편 나씨는 가족얼굴이나 한번 보겠다고 빨찌 산 사령부에서 기밀문서를 몰래 빼내 산을 내려와 자수를 했다. 나씨는 사면과 동시에 군에 입대, 복무를 마치고 비로소 당당한 국민이 되어 옛날 신접살림처럼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59년2월 국회에서 신 국가보안법이 통과되면서 6·25당시범죄사실을 소급 적용해 나씨는 다시 구속되어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었다. 나씨가 기약 없는 무기수로 떨어지자 부인 정씨는 살길이 막막했다. 하루하루 품을 팔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무기수라는 이유만으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했다. 남편보다 더 가혹하게 죄 값을 치른 것이다.
우리나라 행형 법에는 모범수에게 귀휴를 보내는 제도가 있다. 나씨도17년2개월만에 귀휴를 나오게되었다.
나씨는『스님, 태양을 마음대로 보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행복하게 살수 있을 것 같습니다』면서 바뀐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았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 나씨는 22년의 형기 중 3개월을 앞두고 79년12월 최규하 대통령 취임특사로 가석방됐다. 그토록 그리던 밝은 태양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나의 권유로 8개월 간의 씨름 끝에 고백수기『누가 반역자냐』라는 책을 펴냈다. 함평 군수 나승포씨는 이 수기를 감명 깊게 읽고 나씨를 취직까지 시켜주었다. 그후 나씨의 이야기가 TV에서 6·25특집극으로 방송되고 일본잡지에까지 실리자 나씨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여자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과부와 동거하기 위해 2O년 간 옥바라지를 한 부인 정씨를 버렸다. 나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씨는 그 여인과 재혼하여 부산으로 내려갔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정씨는 목포로 가 기독교의신앙심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다.
나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생각하면 악연이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는 맑은 공기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던 사람이 환경이 바뀌자 너무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6·25가 남긴 고통의 상흔이 정씨에게는 참으로 모질게 붙어 다닌다는 생각에 한동안 나는 혼란스러움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