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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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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2일 저녁 야나기 겐이치(유건일)주한일본대사는 고별 리셉선을 가졌다. 야나기대사는 내주중 귀국하고 고토 도시오(후등리웅)대사가 후임으로 오게 된다.
이로써 65년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10명의 주한일본대사를 맞게 된다.
주한일본대사는 일본내에서나 한국에서나 여느 다른 대사와 다른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양국간의 「특수한 관계」때문에 자칫하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켜 양국관계를 뒤틀리게 할수도 있는 미묘한 자리이기도 하다.
또 이제 상당히 개선 됐지만 한일간에는 오랫동안 「파이프 외교」로 불린 정치인들 사이의 막후접촉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해 공식외교의 역할이 제한되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협상보다 「정치적인 타결」을 중시하는 한국의 대일외교 스타일도 직업외교관인 대사의 역할을 제한하기도 했다.
일본의 정치행태와 한국정치인의 유착관계에서 출발한 파이프 외교의 경우 미국등 다른 나라는 접근할 수 없는 깊이까지 서로를 파악하는이점도 있었으나 뒷거래의 의혹을 받았다.
한일외교의 특징인 「특수관계」와「파이프 외교」는 최근들어 점점 공식 외교루트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2∼3차례 역임
주한일본대사는 정치적인 감각도 가져야하고 폭넓은 활동도 해야하므로 중진거물들이 임명 되어왔다.사무차관으로 영전한 스노베대사를 제외하고는 주한대사 임기를마친 뒤 모두 은퇴한 것도다른 곳에서 두세 차례 대사임기를 마친 고참 외교관들이기 때문이다.
초대대사도 이런 조건에 맞추느라 진통을 겪었다. 일본측은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뒤 이세키 유지로(이관단낭)주 네덜란드대사를 초대한국주재대사로 내정,한국정부의 의사를 비공식 타진했다.이세키 대사는일제시절 대전고를 나와 한국을 잘 아는 일본외무성 최고의한국통이다.더군다나 자유당시절부터 민주당·공화당정권에 이르기까지 일본외무성 아주국장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꾸준히 추진해온 점도 고려됐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초대 주한대사는 중국통인 기무라시로시치(목촌사낭칠) 주중대사로 결정됐다.한국내의분위기를 고려해 한국문제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색」한 고참외교관을 택한 것이다.기무라대사는 대만과의 관계정상화도 추진한 인물이다. 기무라대사는 사별한 부인 대신 딸 모토코 (소자)와 함께 부임, 대사관 부지를 구하기 전이라 반도호텔로 들어갔다.반도호텔에는 대표부 개설을 요청하는 일본정부가 65년1월부터 재외사무소라는 것을 개설해놓고 있었다. 6대 대사로 부임할마에다 도시카쓰 (전전리 일 )참사관이 소장이었다. 그는 3개월까리 단기비자로 입국해 있었다.
일본대사관 부지는 기무라대사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야 골목으로 조금 들어간 현재의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의 국민감정으론 일장기가 서울 하늘에서 나부끼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의 성북동 관저는 2대 가나야마 마사히데(금산정영) 대사 시절 이범석 의전실장이 주선해 구한 것이다.
가나야마대사도 부임전에는 한국과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2녀 쇼코(생자) 는 한국인 공학도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친 한적이 됐다. 대부분의 외교관생활을 본부가 아닌 외국에서 했고,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탓으로 보인다.
가나야마대사의 부인 야스코(완자)여사도 이동원·백두진씨등의 부인 20여평과 김자경오페라단의『나비부인』공연을 지원하는등 활발한 활동으로 친분을 확대해갔다.
큰일 잇따라 수난
한일간의 외교문제로 가장고난을 겪은 사람은 가나야마대사의 후임인 우시로쿠도라오 (후궁호낭) 대사다. 그는 부임 5개월만에 김대중씨 납치사건이라는 양국간최악의 사건을 맞은데다 민청학련사건에 일본인 2명이연루된 사건,대통령부인저격사건 (문세광사건)등을 연거푸 처리해야 했다.
그 때문인지 우시로쿠대사는 74년초부터 본부에 사임을 요청했지만 후임자로 지목되면 한결같이 거절하는 바람에 75년초까지 기다려야했다.
이처럼 주한대사가 일본외교관들에게 기피대상이 되자가나야마대사의 동기생으로이미 대사를 세번 지낸 니시야마 아키라(서산소) 주캐나다대사를 임명했다.일본외교관들은 대사직을 세번이상 하는 일이 없이 후진을 위해 자리를 내주는데 니시야마대사는 새로운 기록을세운 것이다.
한일외교가 본격적으로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스노베료조(수지부량삼)대사 때라는 것이 일본관계를 담당했던 외교관들의 대부분이 동의하는 의견이다. 어떤 면에서는 관계정상화 이후 공화당 정권하에서 줄곧 파이프외교에 의존해온 양국관계가 기존의 파이프가 끊어지면서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5공화국에 들어서도 권익현l세 지마류조 라인등 몇개의 채널이계속 가동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경협과 특혜와 떡고물로 요약되는 3공식의 막후교섭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스노베대사는 10·26에서 5·17 ,12·12등 유신시대에서 5공으로 넘어가던 격동기를 맞아 부지런히 상황파악에 주력했다.
스노베대사의 후임은 일본외무부에서는 최고의 한국통으로 알려진 마에다 도시카쓰 (전전리 일 ) 주 아프가니스탄 대사다.
경협실마리 풀어
마에다대사는 인천에서 태어나 앵정국민학교·경성중학·경성제대 법학부를 나와 총독부에서 근무했다.초대 대사로 내정됐다 무산된 이세키대사 때와는 사뭇 다른분위기가 조성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임과 함께 60억달러 경협문제를 마주한 마에다 대사는 연말에는 교과서 파동까지 겹쳐 「일장기를 단 자동차를 타고 대사관저와 대사관 사이를 가는 것이 고통이고, 괴로운 나날」 을 보내야했다.
7대 미카나기 기요히사(어무청상)대사는 정구권-교섭 당시 경제협력과장으로 한국문제에 개입했던 적이있으나 경제협력과장·경제협력국 참사관·경제협력국장등의 경력이 말해주듯 대외경제협력 전문가로 당시양국 정상간에 어렵게 타걸된 40억달러의 경제협력을 풀어나가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됐었다.
야나기 겐이치 (유건)대사는 유성룡이 자신의 조상일지도 모른다며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하는등 친한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야나기대사는 노태우대통령의 방일과 미야자와 기이치 ( 궁택희)총리의 방한을 진정한「한일신시대」의 개막으로 만들어보려 했으나, 양국간 인식의 차이만 확인한 채 무역 불균형과 군대정신대문제등을 새로운 과제로 고토대사에게 넘겨주게 됐다.
그러나 후임으로 오는 고토대사는 마에다 대사시절 주한공사를 역임하고 돌아가아주국장을 역임했다.고토대사는 판단이 빠르고 업무처리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외교관답지 않게 직선적으로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사람이라 주재국 정부·언론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왈본정부는 한국에 대해서도「할 얘기」는 하자는 식이어서 양국관계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였다.<김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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